지난 봄에 나는 부산시장선거와 관련하여 민주노동당에서 서포터로 활동했다.
주로 내가 하는 일은 TV 토론에 관한 것이었다.

TV 토론 후에 반응을 살피기 위하여,
그리고 계속해서 세상 돌아가는 일은 살피기 위하여 신문을 많이 보았고
그것이 내가 하는 일이기도 했다.
내가 주로 본 신문은 <한겨레>였다.
집에서 구독하고 있는 신문이 그것이기도 했고
그나마 내가 지지하는 민노당의 기사를 실어주는 곳이기도 했고
또 나와 같이 민노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는 신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꼭 선거가 아니더라도 <한겨레>를 고등학교 때부터 나는 이 신문을 보아왔다.

올 봄 민노당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 신문을 읽고 있자니 섭섭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TV 토론이 있은 다음날 신문을 보면
이 기자가 과연 TV 토론을 보기나 하고 기사를 썼는지 의심이 갔다.
이제까지 언론에서 다루었던 대로, 그러나 사실과 다른데도,
TV 토론이 안상영과 한이헌의 판이었다는 것처럼 기사가 쓰여져 있었다.
그 기사를 쓴 사람은 노형석이라는 기자였다.
이뿐 아니었다.
노.사.모. 마저 갈등하고 그래서 쉬 입장을 나타내지 못했던 한이헌에 대해서
어찌나 관대하게 기사를 쓰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노형석이라는 기자가 민주당을 지지할 수 있는 일이었고,
민주당이 아니라 노무현을 지지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때 민노당 안에서는 <한겨레> 절독 이야기가 나왔었다.
이건 부산에만 해당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민노당의 중앙당 홈페이지에서 그에 대한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한겨레>에 대한 입장은 정리되지 않은채로 선거가 끝났다.

민노당은 예상 밖의 좋은 결과가 나왔고,
(사실 난 예상 밖 노력 밖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십수년간의 노력의 결과다)
사람들은 그 결과에 도취되어 지난 날 설움도 잊었다.
<한겨레>도 그 결과로 민노당을 조금 대우해주었다.
민노당이 항의하지 않아서일까?
대선에서 <한겨레>는 똑같은 행태를 취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겨레>는 민주당 사랑, 노무현 사랑이다.
그게 역사의 진보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야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여간 이렇게 <한겨레>의 색깔은 명확한데도
다른 색깔을 인정하지 않았다.

민노당을 지지한다고 밝힌, 그래서 TV 토론에 나왔던 홍세화씨를 자격정지 시켰다.
색깔이 있는 것은 민주당 지지인 <한겨레>와 민노당 지지인 홍세화씨는 같은데
한쪽은 자격정지를 시켰고, 한쪽은 자격정지를 당했다.
물론 차이는 있다.
그 차이는 한쪽은 지지의사를 밝히지 않은 것이었고 한쪽 지지의사를 명확히 한 것이었다.

우리 사회는 진실한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지난 봄 5000만원을 받았다고 양심선언했던 민주당 김근태의 경우가 그러하고
한때 남자를 사랑했었다고 밝힌 홍석천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그때 세상이 그들에게 손가락질해도 그나마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봐준 것이
<한겨레>였다.
그래, 그래서 나는 이제까지 <한겨레>를 읽어왔다.

<한겨레>를 두고
형평성이 없다, 이제까지 입장들과 일관성이 없다와 같은 말을 하고 싶지 않다.
단지 <한겨레>가 미워졌다.
물론 나는 모질지 못하게(이전의 나의 모습에서 예외적인 것이다)
잠시나마 진중권처럼(아래 붙임) 구독정지를 결정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처음사랑을 깨끗이 끊어버린 사람을 본적이 있는가. 내겐 <한겨레>가 신문에 대한 처음사랑이다.
그러나 이일로 인해 생겨버린 나의 생각,
'<한겨레> 편파적이다'라는 생각을 쉽게 지울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언론이 당파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편파와 당파의 차이는 편파는 밝히지 않음이고 당파는 의견을 밝힘이라고 해두자.

이제 <조선일보>와 <한겨레>는 어떤 면에서 같아진 셈이다.

<한겨레>, 이제 만족하시는가?


아래 글들 각각 길이가 많이 깁니다.  그러나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글의 순서는,
article 1. 홍세화의 공개질의서
article 2. 홍세화의 견해
article 3. 진중권의 <한겨레>기고 거부 입니다.

article 1

'편집위원장에게 보내는 공개질의서'
-한겨레에도 힘의 논리가 관철되고 있다-

지난 금요일(12/6) 오후에 편집위원장은 나에게 ‘왜냐면’의 편집권을 박탈하고 이를 부국장단에게 넘긴다고 전화로 통보했다. 내가 그 전날 밤 MBC &lt100분 토론>에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 지지자로 참석하여 공개적으로 ‘선거운동’을 벌였다는 것이 이유였다. 나는 편집위원장에게 문서로 된 결정서를 요구했으나 편집위원장은 내가 입사하여 ‘왜냐면’ 편집을 시작했을 때도 문서작성이 없었다는 이유로 내 요구를 거부했다. 통화는 그렇게 편집위원장의 일방적 통보로 끝났다.

나는 지금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살아오면서 적지 않은 일을 겪었지만 <한겨레>에서 이런 인격적 모욕을 당할 줄 몰랐다. 외할아버님은 분노의 깊이가 깊은 그만큼 긴 시간을 참고 기다린 뒤에 대응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돌이키며 사흘을 보냈다. 그 동안 한 가닥 희망을 갖고 편집위원장이 자신이 저지른 전횡에 대해 스스로 성찰하거나, 혹은 부국장단 등으로부터 시정 요구를 받는 등 <한겨레> 조직의 자정 능력을 통하여 이 폭력적 행위가 번복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한겨레>에 힘의 논리가 관철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집단에 숨어 있는 구성원들의 편의적이며 이기적인 수구성을 확인한다.

‘똘레랑스의 부드러움은 앵똘레랑스에 대한 단호한 자세를 요구한다’는 내 원칙에 의해, 편집위원장에게 이 공개질의서를 보낸다. 질문은 아래와 같다(경어 생략).

1. 편집위원장은 나에게서 ‘왜냐면’의 편집권을 박탈한 근거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과정과 절차를 밟았는지 밝히기 바란다. 미리 지적하지만, 기자들의 정당활동을 금지하는 사규를 거론하지 않기 바란다. 사규의 그 조항은 상위 체계인 실정법에 어긋나거니와, 나에게는 이미 사문화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첨부 문서를 참조하기 바란다. 내가 지난 7월 하순에 작성하여 <한겨레> 윤리위원회 앞으로 보냈던 그 글에 대해 나는 아직까지 그 누구로부터도 반론이나 비판을 받아본 적이 없다. 사규에 대한 문제제기에 대해 반론이나 비판을 펴지 않으면서, 사규를 무기로 삼아 행동하는 것은 그 어떤 조직에서도 옳지 않다. 그래서 다시금 묻는다. 나에게서 ‘왜냐면’ 편집권을 박탈한 근거와 그 절차와 과정이 무엇인지를.

2. 편집위원장은 지금까지 ‘왜냐면’의 형평성에 문제가 ‘없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구체적인 예를 적시할 것을 요구한다. 또 편집위원장은 특정정당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에게 여론 면을 맡길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편집위원장에게 그 특정정당 안에 민주당은 제외되는 것인지 묻는다. 멀리 되돌아갈 필요도 없다. 나에게 ‘왜냐면’ 편집권을 박탈한다고 통보한 바로 그 날에 출고된 12월7일치 신문 여론 면에는 최상천 씨의 ‘누가 옳은가’라는 글이 실렸다. 나는 조중동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이회창 선거운동’을 일상적으로 벌이듯이 한겨레 또한 ‘노무현 선거운동’을 일상적으로 벌이고 있다고 보는데, 그래도 그 글만큼 ‘노무현 선거운동’을 노골적으로 하는 글을 보지 못했다. 나는 편집위원장에게 논리적 정합성도 뒤떨어지는 그 글보다 더 심한 편파성을 보인 글을 ‘왜냐면’에 실린 민주노동당 당원의 글 또는 민주노동당에 관련된 글 중에서 적시할 것을 요구한다. 아니, 왜냐면의 모든 글 중에서 단 한 개라도 찾아서 적시할 것을 요구한다.

3. 모든 결정 과정이 무척 느리기로 정평이 나 있는 <한겨레>에서 나에 대한 ‘왜냐면’ 편집권 박탈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윤리위원회의 소집과 그 결정을 기다릴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편집위원장의 답변을 요구한다. 또 MBC 백분 토론에 참가한 것과 비슷한 이유로 참가했던 대한매일 기고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태도를 180도 바꾼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조직은 구성원 사이에 지켜야할 최소한의 윤리가 있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번 편집위원장의 폭거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의 배반을 본다. 내가 왜 이런 수모를 받아야 하는가? 도대체 내가 한겨레에 무슨 누를 끼쳤단 말인가. 기가 막힌다. 50대 중반에 제3의 인생을 시작하면서 왜냐면 기획을 통하여 한겨레에 몸담게 됐다. 나에게서 왜냐면 편집권을 박탈한다는 것은 곧 한겨레를 떠나라는 말과 큰 차이가 없다. 한겨레에 힘의 논리가 관철되고 있다는 것 이상으로 한겨레에서 이런 비인간적 전횡과 폭력이 일어난다는 것에, 또 그것이 견제되지 않고 있다는 것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를 느낀다.

한겨레는 진정 ‘진보적 대중지’를 지향하는가? 나는 종종 한겨레가 조중동과 한나라당의 공격으로부터 민주당을 방어하는 야전사령부에 소속된 홍보실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는다. 또 나는 한겨레에 진보를 용인하지 않는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의혹을 갖고 있다. 아무튼 편집위원장의 한겨레와 나의 한겨레는 다른 게 분명하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길 바란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든 진보정당의 육성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든 한겨레의 아우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한겨레를 쉽게 떠나는 편리함을 택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의 한겨레가 진정한 ‘진보적 대중지’인지 또 <한겨레> 구성원들의 그것은 무엇인지 끝까지 검증해본 뒤에 내 거취를 결정할 것이다.

편집위원장은 나의 공개질의에 대해서 성실하게 답변하기 바란다. 이번 사태가 발생하게 된 데에는 사규와 관련하여 7월말에 제기했던 내 글에 대해 윤리위원회가 유야무야 구렁이 담 넘어가듯 대응했던 탓이 크다. 편집위원장은 그 전철을 밟지 말고 공개적인 글로 답변해주기 바란다. 모두들 이른바 기자 아닌가.

2002년 12월 10일, 작성자 홍세화


article 2

''견제권력'과 진보 언론인의 정당활동'
-일차원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7월24일(2002년) 오전 <한겨레>의 윤리위원장은 나에게 민주노동당에서 탈당할 것을 권유했다. 7월23일 오후에 열린 윤리위원회의 의결 내용이라고 했다. 입사 6개월밖에 안 된 사람으로서 ‘윤리위’의 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 착잡한 심정을 떨칠 수 없었다. 나는 위원장에게 일단 ‘생각해보겠다’고 답변했다. 그런데 한가지 물음이 영영 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나에게 ‘세 개째의 개똥’을 먹으라고 요구하는 게 아닌가, 하는 물음이다. 누가 알았겠는가? 다른 조직도 아닌 한겨레가 나에게 세 개째의 개똥을 먹으라고 권유할 줄을!

한겨레 윤리위의 탈당 권유는 궁극적으로 한겨레냐, 민주노동당이냐의 양자택일 요구로 연결되는 듯하다. 그러나 나에게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켜보려고 애쓴 하나의 원칙과 정면으로 부닥치는 문제이기도 하다. 한겨레의 탈당 권유는 부드럽게 이루어졌지만 내 가슴에 앙금을 남겼다.

한국사회 구성원들은 입당을 쉽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식인들도 젊은이를 비롯한 사회구성원들의 탈정치화를 걱정하지만 스스로 정당에 참여하는 일은 피한다. 예외는 오직 보수정당의 공천을 받을 때다. 풀뿌리 정당정치는 발전하지 못하고 보스 정당정치가 계속된다. 이와 같은 정치상황에서 진보정당 참여는 참여자 나름의 원칙과 세계관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탈당 권유를 1시간 여 동안의 회의를 거쳐 의결한 한겨레 윤리위가 과연 윤리적인가 묻고 싶기까지 하다. 탈당 권유를 받는 사람의 처지에 잠시 동안이라도 서보았다면 정치적 신념 표현을 스스로 부정하라는 요구안을 간단히 의결할 수 있었을까? 물론 정당활동을 금지하는 사규가 있긴 하다. 그러나 구성원의 정치적 신념 표현을 가벼이 여길 만큼 “일단 권유해 보자”라는 행정편의주의가 앞섰던 게 분명해 보인다.

감히 말하건대, 그 문제 조항을 지금까지 꿰차고 있는 것은 한겨레가 시대의 변화와 흐름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그 동안 한겨레가 타성과 나태에 젖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창간 정신을 지키라는 말은 14년 전 창간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이 규정했던 것을 계속 고수하라는 뜻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정치-사회적 상황변화에 끊임없이 긴장하며 대처하라는 요구일 것이다. 실정법이 허용한 자유를 사규로 금지하려면 누구나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나는 납득할 수 있는 그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다.

나는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창간 정신이 구성원의 진보정당 입당을 가로막는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권장해야할 일이라고 본다. 왜 그런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진보정당은 권력(pouvoir)이 아니라 ‘견제권력(contre-pouvoir)’이다. 기자의 정당활동 참여를 반대하는 논리는 아주 단순한 삼단논법에 따른 것이다. 즉, 정당은 권력 장악을 목표로 한다, 신문은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 따라서 기자의 정당 활동은 금지되어야 한다...그러나 단순 명쾌해 보이는 이 논리는 ‘권력’과 ‘견제권력’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 일차원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령 “한겨레는 권력인가, 견제권력인가?” 이 질문은 우문이 될 것이다. 한겨레가 견제권력에서 조중동처럼 권력이 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지만 나는 그 때에는 한겨레에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진보정당이 견제권력에서 권력이 되기를 기대하지만 그 날이 왔을 때 나는 거의 틀림없이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한겨레 사규의 정당활동 금지조항은 본디 권언유착과 언론을 권력지향의 발판으로 이용하는 사이비언론인을 겨냥한 것일 터이다. 그것은 실상 선언적 의미가 컸을 뿐 실효성은 없었다. 그 점을 한겨레 구성원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반면에, 14년 전 창간 당시와 달리, 노동자, 농민 등 기층 민중을 대변하는 진보정당이 합법화된 오늘, 문제 조항은 다만 견제권력의 응집을 가로막는 데에만 작용할 뿐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정당정치 현실에 비추어볼 때, 정당활동 금지조항은 실제에 있어서 기자직을 권력지향의 발판으로 이용하려는 기자에겐 그 어떤 구속력이나 규정력을 갖지 못하는 반면에, 우리가 지금 목격하듯이 진보정당 활동은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기자가 무슨 정당 가입이냐?”라고. 그러나 이 질문은 “교사가 노동자냐?”라는 질문과 같은 차원의 것이다. 기자는 정당 가입의 투명성에 의해 자신이 작성하는 기사에 대한 자기검증을 더 철저하게 하고 일상화하게 된다. 이 점은 기자가 비밀당원일 때와 공개 당원일 때의 차이를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비밀 당원보다 공개 당원이 더 자신의 당파성에 합리적 논거와 균형감각을 요구받는 것이다. 가령 나는 ‘왜냐면’에 실릴 글을 선정하면서 공개 당원일 때와 그렇지 않을 경우 민주노동당 관련 글에 어떻게 반응할까? 똑같이 반응해야 마땅하지만 공개 당원일 경우 균형감각에 더욱 신경 쓸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왜냐면’에 민주노동당 당원의 글은 “진보정당 토론 참여 막지 말라”, “그렇더라도 장상 총리를 앉히고 싶다”의 두 개가 실렸을 뿐이다. 내가 만약 공개 당원이 아니었다면 한두 개의 글은 더 실렸을지 모른다.

요컨대, 한겨레의 문제 조항은 구성원들에게 자기성찰과 긴장을 덜 요구하는 비밀당원이 되도록 부추기는 어리석음을 저지른 것이다. 기자의 양식(良識)과 자율성에 맡겨두어야 할 부분을 침범한 결과다.

기자가 지켜야할 객관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면 팩트 뿐이며 이에 대한 시각과 분석에 차이가 있다. 기자의 정치-사회적 의식과 가치관, 세계관은 그가 당원이든 아니든 기사 작성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기자의 당파성에 합리성이나 균형감각이 담겨있는가 없는가에 있다. 그리고 기자의 당파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은 드러내지 않는 것보다 객관적 검증의 가능성을 높이게 된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칼럼 난에 이따금 등장하여 한국의 정치-사회적 현안에 개입하는 기 소르망이라는 프랑스인이 있다. 그는 ‘석학’, ‘문명비평가’라고 소개된다. 일반 독자는 그의 칼럼이 석학 문명비평가의 객관적 시각에서 나온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프랑스에서 신자유주의를 맹종하는 자유민주당의 이데올로그로서 ‘세계화란 곧 미국화’인데 그것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프랑스에선 <피가로>지에 어쩌다 실리는 그의 글에 그의 당파성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지만 한국에선 석학 문명비평가의 객관성이 담보된 글로 둔갑한다. 이 수법은 조선과 동아가 그들의 보수-수구적 편향을 신문에 철철 넘치게 하면서도 객관성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는 속임수와 같다. 그렇다면, 진보적 대중지를 지향하는 한겨레는 기자의 당파성을 드러내지 않고 객관성을 담보한 양하는 것과 오히려 그것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자기 검증과 객관적 합리성을 요구받도록 하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해야 마땅한가. 나아가 한겨레는 구성원들에게 민주노동당 등의 진보정당 공개 가입을 적극 권유하여 민주당, 한나라당 공개 가입도 이끌어냄으로써 권력 지향적인 비밀 당원이 없도록 하는 쪽이 더 바람직하지 않은가?

어떤 이는 말한다. “진보정당의 당원임이 밝혀진 한겨레 기자의 기사나 분석에 대해 조중동 등이 물고늘어질 것”이라고.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시기는 지났다. 그 기사나 분석에 합리적 논거가 담겨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돌파할 수 있고 또 돌파해야 한다. 조중동은 한겨레의 준거 참조물이 아니다. 한겨레의 차별성은 조중동을 준거 기준으로 하는 차별성이 아니라 한국사회에 치열히 대면함으로써 획득되는 것이어야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한다. “한국에서 신문이 대선 후보중 지지 후보를 밝힐 때가 아직 못된 만큼 기자의 정당활동도 아직 시기상조다”라고. 그러나 신문이 대선 지지후보를 밝히는 것과 기자가 가입 정당을 밝히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각 나라 정당정치의 현실에 따라 신문이 대선 지지후보를 밝힐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자의 정당 가입은 내가 아는 범위의 모든 나라에서 허용되고 있다. 지금 시기상조라면 그 때는 언제 오는가? 모든 사용자에게 주5일 근무제는 언제나 시기상조다. 진보적 대중지를 지향한다면 지금까지 잘못된 타성을 정면에서 깨부숴야 마땅하다. 진보적 대중지가 진보의 투명성을 회피해서야 되겠는가?

<경위와 요구>

나는 한겨레 사규가 구성원들의 정당 가입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7월22일 조상기 편집국장을 통해 처음 인지했다. 금년 1월16일의 귀국 이전까진 실정법 상으로 언론인의 정당 참여가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고, 2월1일 한겨레 입사 시에 나는 사규를 읽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3월에야 나는 언론인과 대학교수의 정당활동이 허용되었다는 점을 알게되었다. 김석준 부산대 교수가 민주노동당 후보로 부산 시장 선거에 나선 것을 보면서였다.

나는 3월30일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프랑스에 있을 때부터 글쓰기를 통해, 또 나 자신에게 약속한 것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보잘것없지만 나에게 허용된 상징자본을 진보정당에 힘을 실어주는 데 써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입당하던 날, 나는 “내 생전에 기층 민중을 대변하는 진보정당에 합법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날이 올까?”라고 처연히 자문했던 30년 전의 내 모습을 되돌아보면서 잠시 감격스러워했다. 지금도 나는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기보다는 ‘진보’정당에 입당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당원으로서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매달 당비를 내고 당 기관지인 <진보정치>에 한 달에 한 차례 칼럼을 기고하는 일이다.

나는 언론인의 정당활동을 정당법은 허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불허되고 있다는 얘기를 몇 차례 들었다. 그런데 사람마다 서로 다른 근거를 댔다. 나는 막연히 기자들끼리 정당활동을 하지 않겠노라고 서약한 <기자윤리실천요강>같은 것이 있나, 하고 짐작했을 뿐이다. 워낙 정당활동 불허를 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세히 알아보지 않은 탓도 있다. 그러나 정당법이 허용하는 것을 한겨레가 허용하지 않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무튼 나는 사규를 어겼다. 하지만 나는 한겨레와 진보정당이 양립불가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양립되어야 한다고 보는 편이다. 나는 한겨레를 떠날 의사가 추호도 없듯이 진보정당을 떠날 의사도 추호도 없다. 나는 문제 조항의 개정을 요구한다. 앞으로 정해진 날까지 개정 여부를 심의해주길 바란다. 그 날까지 사규를 어긴 구성원으로서 불이익을 준다면 감수하겠다.

홍세화


article 3

한겨레에 기고를 거부하며-
주인과 머슴의 변증법

진중권 기자 mkyoko@chollian.net

한겨레 신문에서 홍세화씨의 '직무'를 정지시켰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가 한겨레의 내규를 어기고 특정 정당에 가입했다는 것이라 한다. 홍세화씨가 민주노동당원이 되어 정당활동을 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따라서 뒤늦게 대선을 맞은 이 시점에 튀어나온 그 징계의 배경에 관심이 쏠릴 수 밖에 없다. 한 마디로 그것은 그가 MBC의 <백분토론>에 나가 공개적으로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그 발칙한 짓에 대해 한겨레는 '조직의 쓴 맛'을 보여준 것이다. 원래 조직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나는 그가 민주노동당에 가입한 이후 한겨레 '왜냐면'이라는 지면이 민주노동당의 당파적 이익에 맞게 왜곡된 사례를 알지 못한다. 아울러 그의 인격으로 보아 앞으로도 그가 자신의 당파적 이익 때문에 그 지면을 왜곡할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가 MBC 방송에 나갔다는 사실이 '왜냐면'이라는 지면의 공정성과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겨레는 그의 직무를 정지시켰다. 단지 그가 개인의 자격으로 특정 정당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에서 그에게 징계를 내렸다. 이것이 소위 '진보 언론'를 자처하는 한겨레에서 한 짓이다.

1988년 아침에 배달되어온 네 면 짜리의 조촐한 창간호를 보며 감격에 젖었던 기억이 난다. 그 기억 때문에 오랫 동안 외국생활을 하고 돌아와서도 직접 찾아가 구독을 신청을 했던 신문. 바로 그 신문이 '진보'의 이름으로 이런 만행을 저질렀다. 아마 그들은 이 만행을 '내규' 운운하며 실정법 논리로 정당화할 것이다. 그럴 것이라면 국가보안법도 분명히 실정법이니 한겨레 신문은 앞으로 그 법을 착실히 지킬 일이다. 악법도 법이니 신성하게 지킬지어다. 그 빌어먹을 내규도 내규니 신성하게 지킬지어다. 내규도 신성하게 지키는 한겨레는 당연히 서슬퍼런 국법도 군말없이 지키는 충실한 신민이 될지어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은 만세다.

정작 당파적인 것은 누구인가? 최근 한겨레의 보도는 위험수위를 넘었다. 서울시장 선거 때의 일은 이미 지난 일이니 다시 거론하기 싫다. 대선을 맞은 이 시점에도 한겨레는 또 한번 제 정신을 잃기로 했다. 소위 '하니 리포터'라는 곳을 들여다 보라. 이미 특정 후보의 선전매체를 방불케 할 정도로 명백한 역겨운 정치적 편향을 드러내고 있다. 한겨레 지면 역시 대단히 노골적으로 특정 후보를 지원하고 있음을 누구나 다 알 것이다. 심지어 만화가까지 나서서 노골적으로 민주노동당을 견제하며 속들여다 보일 정도의 비열한 편파성을 드러내고 있다.

홍세화가 이미 지적했듯이 얼마 전에 실린 최상천의 글은 한 마디로 현대판 용비어천가다. 이회창도 서명하는 성명서에 정작 노무현은 서명하지 않았다. 그는 이것 역시 옳다고 주장한다. 사실 정치인인 노무현이 그렇게 주장하는 데에는 일리가 있다. 하지만 정치인 본인도 아닌 지식인이 나서서 행여 그에게 누가 될세라 그 짓을 옳다고 변명해주는 것은 내가 가진 윤리적 직관에 심히 거슬린다. 대통령도 되기 전에 부르는 이 함량미달의 용비어천가가 한겨레 신문에는 아무 여과 없이 그대로 실린다. 이런 편파성은 데스크의 심기를 하나도 안 거스르나 보다.

그런 한겨레가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사람, 한겨레의 기자가 아닌 '아웃사이더 편집위원'의 명찰을 달고 나간 TV 토론을 문제 삼아 그의 편파성을 문제삼는다. 이게 소위 '국민주'로 만들어진 신문을 가지고 그 기자들이 하는 짓거리다. 한겨레가 당신들 기자의 것인가? 이 질문에 아마 이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것이 민의라고. 룻소가 말한 국민들의 일반적 의지라고. 우리 기자들만의 견해가 아니라 소위 국민주 신문의 주주들의 뜻이라고.

맞다. 그래선지 그 신문의 주주모임에서 오늘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공개선언을 했다. 한 마디로 한겨레 신문의 소유주를 자처하는 자들이 분명하게 자기의 정치적 색깔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은 한겨레를 법적으로 소유한 자들이고, 홍세화는 한겨레에 고용된 피고용인에 불과하다. 따라서 한겨레를 소유한 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도 되되, 거기에 고용된 자는 같은 일을 한 댓가로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국민주'로 만들어진 절대정신이 전개하는 주인과 머슴의 변증법이다.

한겨레의 주주들이 개인적으로 특정 후보의 지지를 선언하는 것은 아무 문제도 없다. 하지만 한겨레 신문은 소위 '국민주'로 만들어진 신문, 그 신문을 만든 주체는 민주당이 아니라 '국민'이다. 그런 모임에서 특정 후보의 지지를 선언하고 나선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적절하지 않다. 왜 그들은 한겨레의 모든 주주들이 자기들의 정치적 선택을 따를 것이라 착각하는가? 도대체 그들은 무슨 권리로 한겨레 주주들의 대표임을 자임하는가? 도대체 언제부터 한겨레가 특정 정당의 기관지였던가? 그 짓을 하라고 국민들이 주식을 샀던가? 한겨레 사옥 벽의 동판에 새겨진 그 많은 이름들을, 왜 한 줌도 안 되는 소수의 사람들이 독점해야 하나?

한겨레만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오마이뉴스'의 행태 역시 도를 넘어섰다. 객관적으로 판단할 때, 오마이뉴스의 편향성은 분명히 조선일보의 그것을 넘어섰다. 내가 한 때 열심히 조선일보를 비난했던 그 이유들을, 오늘 나는 '오마이뉴스'에서 더 명확하고 분명한 형태로 본다. 지금 오마이뉴스는 전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편파적이며 선정적인 정치 황색지의 길을 걷고 있다. 당신들이 쓴 기사들, 당신들이 채택한 기사들을 보라. 그리고 객관적으로 당신들이 조선일보와 뭐가 다른지 나를 납득시켜 보라.

조중동이 특정 정당에 행하는 사소한 음해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오마이뉴스에서 정작 소위 진보언론인 한겨레에서 저지른 이 해괴한 짓거리에에 대해서는 보도를 안 하거나, 마지 못해 해도 그 기사를 저 구석에 쳐박아 놓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미리 안다. 이 자칭 '대안언론'에게 중요한 것은 더 이상 공정성도, 객관성도, 사회정의도 아니다. 그런 것은 미천한 시민들이 추구할 것이 아니라, 노란 슈퍼맨이 대통령이 되어 비로소 베풀어줄 시혜다. 그러니 신부의 화장을 하고 구세주의 재림을 기다릴지어다. 아멘.

분명히 경고한다. 당신들은 그릇된 길을 걷고 있다. 세상 모든 언론이 어차피 당파적이라 생각한다면, 앞으로 조중동에 대한 비난만은 삼가주시라. 다른 것은 다 이해해도, 조중동 못지 않은, 심지어 그들을 능가하는 편파성을 드러내는 이 매체들이, 편파적인 이유에서 조중동을 비난하는 이유만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조중동은 한나라당의 기관지, 한겨레와 오마이뉴스는 민주당의 기관지, 피차 기관지이니 앞으로 자기의 당파성을 위해 누가 왜곡보도, 확대보도, 축소보도를 잘 하는지 선의의(?) 경쟁을 벌일 것을 선언하라.

언론개혁을 떠들던 지식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라, 이것이 당신들이 만들어낸 대항언론의 유토피아다. 기껏 이 꼴을 보기 위해 사이비 언론들과 싸워 왔던가? 조중동이 하는 일에는 사소한 것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던 당신들, 왜 이 순간엔 침묵하는가? 남에게는 침묵할 권리마저 부정하고 그 입장을 집요하게 묻던 당신들, 지금 무엇하고 있는가? 우리의 비판이 기껏 특정 당의 이익을 위한 립 서비스에 불과했던가? 오늘 나는 당신들의 진정성을 심각하게 의심한다.

한겨레 신문이 그 빌어먹을 징계를 철회할 때까지 오늘 부로 그 신문의 구독을 거부한다. 아울러 그 알량한 지면에 얼굴 내비칠 권리를 반납한다.

분명히 경고하지만 당신들은 그릇된 길을 걷고 있다. 집권하기 전부터 보이는 이런 행태로 보아, 당신들의 집권으로 약속하는 유토피아의 약속을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선거 때만 되면 다들 미쳐버리는 이 빌어먹을 사회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신문을 끊고 기고를 거부하는 것 밖에 없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이런 짓을 하여 얻어질 '당신들의 천국'에 미리 조의를 표한다.



여기서 '<한겨레>, 만족하시는가?'는 끝입니다.
신고
Posted by 토닥s

댓글을 달아 주세요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