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2년쯤 흘렀나 봅니다.  
내가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그걸 알게 된 날로부터 말입니다.

그때 나는 내 인생의 책, <태백산맥>을 다시 읽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읽고서 언젠가 다시 한번, 나를 구성하고 있는 앎이 바뀌었다고 생각되는 즈음
다시 한번 읽겠노라고 마음먹었던 그 책을 대학졸업을 앞두고 읽고 있었습니다.
그때가 바로 다시 읽어도 될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마음 닫고 있던 시절이라 수업을 일주일에 3일만 들었고,
그마저도 듣고선 바로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런 어느날이었습니다.  

햇살이 남아있는 오후였습니다.
날씨는 쌀쌀했지만 햇살이 버스 안에 있는 기운을 데워주고 있었죠.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오른 나는 지금도 그런 것처럼
뒤에서 두번째 자리에 앉았습니다.

남산동인가, 범어사인가에서 한 소년이 탔습니다.
버스 안에 자리가 많았는데, 옆자리에 앉더군요.
소년을 게의치않고 읽고 있던 책을 계속해서 읽었습니다.
옆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 왔습니다.
소년이 내가 읽는 책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뒤늦은 생각이지만 소년은 내가 보는 책을 보았던 것이 아니라 책 읽는 나를 보았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때야 비로서 옆자리에 앉은 소년에게 눈길을 주었습니다.

힐끗 살펴보니 평범하지 않은 소년였습니다.
장애아였습니다.
지식이 없어 잘은 알지 못하지만 소아마비, 뇌성마비 이런 병을 앓고 있는
또는 앓았던 아이인 것 같았습니다.
짧은 순간 나쁜 마음을 먹었습니다.
'왜 내 옆에 앉았지..'

소년은 나의 눈길을 의식했던지 허둥지둥 관심을 거두더군요.
무안했던지, 아니면 책 읽는 나를 본 탓인지 소년도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더군요.
잘은 생각이 안나지만 필기노트였던 것 같습니다.
나도 소년이 그랬던 것처럼 책 읽는, 아니 노트 읽는 소년을 훔쳐보았습니다.
뭐라고 쓰였는지 알아 볼 수 없는 노트.
소년은 소리를 내어 중얼중얼 뭐라고 쓰여졌는지 알 수 없는 글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더군요.

지금 생각해보니 나쁜 마음을 계속해서 먹었던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적으로, 아니 그 소년을 의식해서
소년의 반대쪽으로 자리를 약간 옮긴 것 같습니다.
그러고서 다시 책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버스가 집 있는 동네 길목에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옆에 앉은 소년을 보았습니다.
소년은 꺼내었던 노트에서 이미 관심을 잃고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있더군요.
그때서야 슬며시 마음이 쓰였습니다.

'집이 어딘 줄은 알까?'
'혹시 내려야 할 곳을 지나친 것은 아닐까?'
'집이 어디냐고 물어볼까?'
차마 용기가 안나더군요.
그 아이에게 말을 걸 '용기'말입니다.

그렇게 갈등하고 있던 찰나 내려야할 정류장이 되어 내리고 말았습니다.
버스에서 내려서는 버스 안에서 말을 걸까, 말까의 갈등보다
더 크고 무거운 마음의 짐을 져야했습니다.
'물어볼 껄..'

지나서 그날 있었던 일을 후배에게 편지로 썼습니다.
후배는 집 정도는 찾을 수 있었기에 집에서 외출을 시켰을 것이다라고 위로(?)의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날 알았습니다.
나를 구성하고 있던 앎이 변화했으니
다시 내 인생의 책을 읽어야 할때라고 생각했던 오만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날 생각했습니다.
소년이 가졌던 신체적 장애보다 내가 가진 장애가 더 클런지도 모른다고.


한겨레논단
진정한 장애인은 누구인가

1992년께 미국 보스턴에서 1년 동안 산 적이 있다. 길거리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시내버스를 타는 것을 여러차례 목격하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버스의 승강계단이 없어져 휠체어를 태워 오르면 다시 계단이 생겨 다른 사람이 탈 수 있도록 바뀌는 작동과정을 보여 주었다. 이른바 ‘저상버스’였다. 장애인 한 번 태우는 데 4∼5분이 걸렸다. 더욱 신기한 것은 그 차에 타고 있던 승객이나 뒤이어 타던 승객들 누구 하나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장애인들에 대한 특별한 배려는 사회 곳곳에 나타나 있었다. 지하철, 비행기 등 모든 교통수단, 공공기관과 장소에서 장애인은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장애인을 그 사회에서 보통 쓰고 있는 장애인(disabled) 대신에 ‘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differently abled)이라고 일컫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용어 속에 담긴 장애인 배려와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

(..중략)

최근 장애인 단체들은 일제히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실을 점거하고 이동권 보장 등을 외치며 장기간 농성을 벌였다. 그 이전에도 지하철의 철로 위에서 시위하기도 하고 시내버스에 휠체어를 묶은 채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정당한 의사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이런 극단적인 의사표현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열악한 상황에 이해가 간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바로 우리들의 무관심에 있다. 대선 후보들이 쓸데없는 정치적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바로 이런 민생현안부터 하나씩 챙겨야 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미국처럼 일반법으로 ‘장애인 인권기본법’이라도 하나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가치는 소수자의 보호에 있다. 가장 약하고 소외된 소수자에 대한 배려야말로 인간적 존엄성을 높은 가치로 설정하고 있는 우리 헌법의 정신이기도 하다. 그런데 장애인들이 이렇게 소외되고 무시되고 유린된다면 우리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장애인들이 보통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들도 모두 또다른 정신적 장애인과 다를 바 없다. 박원순 /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한겨레 2002/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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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장애인에게 말걸기'는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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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닥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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