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지난 여름, 서울서 들었던 강좌에서 한 선생님이 이야기했다.
80년대 후반 서울을, 꼭 서울뿐 아니라 변화하는 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90년대 이후에 느꼈던 공황감에 대해서.
그 공황감이 담긴 노래가 '92년 장마, 종로에서'라고 했다.

오늘 저녁 본 일요스페셜에서 김민기가 또 한번 말했다.
90년대 이후 사람들이 느끼게 된 '정신적 공황감'에 대해서.
그것이 그의 '지하철 1호선'에 나오는 학생운동권 '안경'이 가짜 대학생 '안경'으로 바뀌게 되는 배경을 제공했다고 했다.
주의, 주장이 공허하게 들리기 시작한 시점에서 '안경'은 바뀌게 된 것이다.

김민기의 말을 듣고 떠오른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들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고서 채널을 돌렸다.
9시 뉴스데스크를 보던 나는 텔레비전 앞에서 얼어붙었다.

첫 뉴스에 노동자들은 화염병을 던졌다.
양어깨를 붙잡혀 가던 노동자는 경찰의 검고 딱딱한 군화발에 무너졌다.
연행되어 머리를 숙이고 웅크리고 앉아있는 노동자는 얼굴에 피범벅을 하고 있었다.
경찰의 발길질과 방패, 그리고 노동자의 화염병이 화면에서 어지럽게 뒤섞이고 있었다.



바로 2003년 종로에서.


02.
92년 장마, 종로에서 / 정태춘·박은옥


모두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탑골공원 담장 기와도 흠씬 젖고
고가 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
건너 빌딩의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
비는 내리고
장마비 구름이 서울 하늘 위에
높은 빌딩 유리창에
신호등에 멈춰서는 시민들 우산 위에
맑은 날 손수건을 팔던 노점상 좌판 위에
그렇게 서울은 장마권에 들고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 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워, 워..
저기 우산 속으로 사라져 가는구나
입술 굳게 다물고 그렇게 흘러가는구나.
워, 워..


비가 개이면
서쪽 하늘부터 구름이 벗어지고
파란 하늘이 열리면
저 남산 타워 쯤에선 뭐든 다 보일게야
저 구로 공단과 봉천동 북편 산동네 길도
아니, 삼각산과 그 아래 또 세종로 길도
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 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
보라, 저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훠이, 훠이.. 훠이, 훠이..
빨간 신호등에 멈춰 섰는 사람들 이마 위로
무심한 눈빛 활짝 열리는 여기 서울 하늘 위로
한무리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훨, 훨, 훨..


03.
아마도 '정신적 공황감'이란,
있던 것이 없어지는 것에서 오는 상실감이 아니라
있던 것이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없다라고 인정하기를 강요받기 때문에 오는 불안함이 아닐까.


04.
그러나,
알고보면 그 공황감이라는 것도
배운 자들의, 가진 자들의 사치가 아닐까.
나 같이 몽상만 하는 자들의.

답답하구나.

사진출처
- 인터넷한겨레 '노동자 5만명 도심 격렬시위'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3/11/005000000200311100029001.html


여기서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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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닥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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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까지 계속된 이번 학기의 마지막 과제를 마무리하고
졸다가, 말다가 그러면서 학교 갈 준비를 했다.
컴퓨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인터넷 라디오와 함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전인권의 목소리.
그거 하나만으로도 나의 바쁜 움직임을 멈추기에는 충분했다.

그런데
전인권, 그가 부르는 노래와 노랫말은 나의 모든 것을 멈추게 했다.
홀린듯 가만히 노래를 들었다.

느즈막히 집에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아 그 노래를 찾았다.
바로,
이 노래이다.  


봉우리 (원곡 : 김민기)

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키지 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
내가 전에 올라가 보았던 작은 봉우리 얘기 해줄까?
봉우리.
지금은 그냥 아주 작은 동산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 때 난 그보다 더 큰 다른 산이 있다고는 생각지를 않았어.
나한텐 그게 전부였거든.
혼자였지.
난 내가 아는 제일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고 있었던거야.
너무 높이 올라온 것일까?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일까?
얼마 남지는 않았는데.
잊어 버려! 일단 무조건 올라보는거야.
봉우리에 올라서서 손을 흔드는거야, 고함도 치면서.
지금 힘든 것은 아무 것도 아냐.
저 위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 늘어지게 한숨잘텐데 뭐.

허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거기 부러진 나무 등걸에 걸터 앉아서 나는 봤지.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작은 배들이 연기 뿜으며 가고.

이봐 고갯마루에 먼저 오르더라도
뒤돌아서서 고함치거나 손을 흔들 필요는 없어.
난 바람에 나부끼는 자네의 옷자락을
이 아래에서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말야.
또, 그렇다고 괜히 허전해 하면서 주저앉아 땀이나 닦고 그러지는마.
땀이야 지나가는 바람이 식혀주겠지 뭐.
혹시라도 어쩌다가 아픔같은 것이 저려올 때는
그럴 땐 바다를 생각해. 바다.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이야.

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우리 땀흘리며 가는 여기 숲속에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지금 바로 여긴지도 몰라'는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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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닥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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