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4.02.09 [people] '보람쑤언'
  2. 2003.11.06 [etc.] '전쟁에 대하여 생각하다'
  3. 2003.03.19 [photo] 'my traveling'
  4. 2003.02.28 [people] '행복한 아이, Kim Phuc'

며칠 전 일년만에 보람쑤언 VoLamXuan을 만났습니다.
쑤언은 지난해 베트남 여행 때 알게 된 친구지요.

언니와 저는 베트남 음식도 나쁘지 않지만
세 사람의 식사비용이 베트남 교사의 월급을 웃도는 베트남 음식을 먹는다는게 좀 껄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동래파전입니다.
동래파전 역시 저렴한 가격은 아니지만 한국음식을 경험한다는 차원에서 좋을 것 같아서요.









쑤언도 새로운 경험이라는 점에도 좋아하더군요.
베트남으로 돌아가면 하노이 사범대학에서 한국학을 강의할 예정이라더군요. 아마도.('_' ):
그래서 베트남 학생들에게 보여줄 자료로 동래파전 사진도 찍었습니다.

쑤언은 하노이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문학교사로 2년간 교직생활을 하다
부산대 부설 동아시아연구소(맞나 몰라.(. . )a)의 지원으로 한국에 어학연수를 오게 되었습니다.
그 인연을 시작으로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에 진학했고
지금은 대학원 수료 상태로 논문 수정단계에 있습니다.
논문주제는 한국과 베트남의 주술문학(?) 비교입니다. 아마도.('_' ):





쑤언은 한국문학을 베트남어로 번역하여 베트남에 한국을 소개하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을 읽고 있답니다.
쑤언은 그 소설이 베트남전쟁을 소재로 했기 때문에 선택했다고 하지만
저는 다른 책을 추천했습니다.
바로 황석영의 또 다른 소설 <손님>입니다.

베트남과 한국은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식민지 역사가 그러하며 통일을 위한 전쟁의 역사가 그러하죠.
베트남은 전쟁을 통해 통일된 국가를 건설했지만 한국은 아니죠.
비슷하면서도 다른 한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손님>을 권했습니다.
그 자리에선 달리 떠오르는게 없더군요.
떠오르는 좋은 작품이 있나요? 추천해주세요.

쑤언은 올해 7월이면 베트남으로 돌아갑니다.
기회가 되면 박사과정을 위해 한국으로 올 생각이라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네요.
계속해서 인연으로 남을 수 있을까요?
노력하기 나름이겠죠?(^_^ )


여기서 '보람쑤언'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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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話頭)1'에 이어서 씁니다.


01.
읽기 전에

베트남은 10세기부터 독립왕국을 이루었으나 19세기에 프랑스 식민지가 되고, 20세기 전반에는 일본의 침략을 당한다.

1941년 호치민이 주도하여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을 결성하고 일본군과 싸우다, 45년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자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한다.  제2차 세계대헌 기간에 독립을 약속했던 프랑스는 태도를 바꾸어 이를 인정하지 않고, 그 결과 이듬해부터 54년까지 베트남과 프랑스는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을 치른다.

1954년 5월 7일 프랑스군의 거점인 디엔비엔푸를 함락하면서 독립한 베트남은 7월 제네바휴전협정에 따라 북위 17˚선을 경계로, 베트남민족인민저선(베트민의 후신)이 주도하여 하노이가 수도인 북베트남과, 프랑스군의 지휘를 받던 베트남인들이 주도하며 사이공이 수도인 남베트남으로 나뉜다.  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남으로 혹은 북으로 향했다.

제네바협정은 남북 베트남을 통합하기 위해 56년에 국제감시위원회의 감독 아래 베트남 전역에 걸쳐 자유선거를 실시하도록 했다.  그러나 남베트남의 고 딘 디엠 총리가 이를 거부하고 경찰정치를 펼치자 제대군인과 지식인들이 베트콩(Viet Nam Cong San)을 결성, 게릴라전을 전개한다.  베트콩은 1960년에 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의 군사조직이 된다.  북베트남은 1959년 조직으로 이들을 지원하기 시작, 라오스·캄보디아 국경을 따라 남베트남에 이르는 호치민로 건설에 착수한다.  사회주의 체제인 북베트남 주도로 베트남이 통일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이 개입힌다.  이것이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 곧 '베트남전쟁'이다.

1961년 1월 캐네디 대통령은 비전투군사요원을 파견하여 이른바 '특수전쟁'-게릴라전·비밀전(정보수진·선전·파괴활동)을 전개한다.  64년에 미군 구축함 매독스호가 북베트남의 초계정들에게서 사격을 받았다는 이른바 통킹만 사전이 일어난다.  뒤에 미 국방부의 베트남비밀보고서(펜타곤 페이퍼)가 폭로됨으로써 미국의 조작이었음이 드러나지만, 당시 존슨 대통령은 이 사건을 계기로 북베트남 폭격명령을 내린다.  이때부터 전투부대가 투입되기 시작하여, 1969년에는 참전미군 규모가 최대 54만 9500명에 이른다.  우리나라도 파병, 그 인원이 모두 31만이 넘었다.

베트남전쟁은 동원병력·사상자 수·항공기 손실·사용탄약량·전쟁비용 면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웃돌았고, 사용탄약량·투하폭탄량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규모를 훨씬 넘어섰다.  역사상 가장 큰 파괴전쟁이었다.

1968년 1월 30일 북베트남군과 NLF는 무신년 뗏(음력설날)을 기해 대공습을 감행한다.  그 전해부터 미국내의 반전운동이 힘을 더해갔고, 미국정부는 남베트남 반군을 진압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점점 잃게 된다.  파리에서 평화회담이 시작되고, 73년까지 회담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된 끝에 미군과 외국군이 철수한다.

1975년 NLF와 북베트남군은 총공세를 시작, 4월 30일 남베트남정부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사이공이 함락된다.

1976년 남북베트남통일국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를 선포,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성립한다.  수도는 하노이로 정하고, 사이공은 호치민 시로 이름이 바뀐다.

- 바오닌의 <전쟁의 슬픔>



02.
개인적인 관심과 애정이기도 한 베트남, 그리고 베트남전쟁.
베트남전쟁이 오늘날 나에게 유효한 이유는
그 모습이 지금 이라크전쟁과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 한국전쟁과도 너무나 똑같이 닮은 꼴이다.


03.
'베트남전의 베트남화'전략은 1968년 1월 30일 북베트남과 비엣공들의 '구정대공세'이후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의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인정하고 추진한 전략이다.
미국은 1964년 8월 2일 이른바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북베트남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나서, 늦어도 1965년 말까지 전쟁을 끝낼 수 있으리라 장담하고 있었다.  최초의 전쟁전략은 이른바 '베트남을 구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는 '대대적인 융단폭격 전략'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초토화 작전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과 비엣공들의 기세가 전혀 꺾이지 않자 미국은 1966년에 접어들어 '평정작전'이라 불리는 '강력한 전략촌 계획'을 추진한다.  
초토화작전의 실패가 비엣공들과 주민들의 교류 때문이라고 판단한 미국은 주민들을 '전략촌'이라는 '집단강제수용소'에 수용시키고, '전략촌' 외의 지역은 '자유살상 지역'으로 선포해 전략촌 입촌을 거부하는 주민들을 비엣공으로 간주, 무차별적으로 살상한다.

- 반레의 <그대 아직 살아있다면>



04.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태백산맥>에도 '부락 소개 작전'이라는 것이 나온다.
빨치산과 주민들의 교류를 막기 위해 부락을 이전시키는 것이다.
살 곳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았음은 잠시 뒤로 미루고.

1952년 당시 강제 이전을 거부한 사람들이 빨치산과 교류, 이른바 내통한 사람들인지 아닌지 지금의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마도 그들이 땅을 일궈 먹고 사는 농민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1966년 전략촌으로의 이주를 거부한 베트남 사람들 또한 비엣공이 아니라 다수가 농민이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베트남을 구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는 미국의 오만함에 치가 떨린다.


05.
얼마전 KBS 1TV <일요스페셜>에 한국이 파병하려는 지금 바그다드의 모습이 나왔다.
미군은 게릴라 토벌, 치안유지를 하면서 아이들에겐 학용품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마침 학교를 마친 아이들은 거의 모두 미국과 이라크의 국기를 배경으로 맞잡은 손 그림이 있는 똑같은 가방을 메고 있었다.
그 가방 속에 든 노트며 다른 학용품에도 같은 그림이 있었다.
이런 학용품을 주니 미군이 좋지 않냐는 물음에
미군에게서 그 가방과 학용품을 받았다고 말하는 아이가 말했다.

"낮에는 좋지만 밤에는 싫어요."

파병을 지지하기 전에, 아니 파병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전에 한번쯤 지난 역사를 돌아보았으면 한다.
꼭 지난 역사가 아니어도 지금 바그다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으면 한다.

바그다드, 그곳에서는 수많은 이라크인들과 미국의 젊은이들이 죽어가고 있다.
미국의 젊은이들도 이제는 고향,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여기서 '전쟁에 대하여 생각하다'는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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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행 때 다른 분들 카메라에 찍힌 접니다.
필름으로 찍어 인화한 사진도 있고,
디지탈로 찍어 인화한 사진도 있습니다.
여러 사람에게서 한장씩 받다보니 각각 느낌이 다릅니다.
그걸 스캐닝하니 또 다른 느낌으로 바뀌었네요.

스스로가 카메라를 사용하기전에도 그랬지만
사진 찍히는거 싫어하거든요.
실물도 그렇고 그런데, 사진은 더 그렇고 그렇게 나와서요.(__+)
여행 때도 부지런히 피해다녔는데 어찌어찌 모아놓으니 열장쯤 되네요.
한 두장 모인 사진을 보니 기분이 그러네요, 알 수 없는 기분.
그러나,
선명한 생각 하나 '또 가고 싶다'





탐콕(tomcoc)이라는 곳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작은 배를 타고 늪지에 가까운 강을 따라 가는 겁니다.
중국 수묵화에 나오는 산들, 봉긋 솟은 산들이 논 사이사이 있습니다.
풍경이 수묵화 같죠.




탐콕(tomcoc)을 나서면서 밥을 먹었던 곳입니다.
여기 사진에 계신분과 함께 여행을 했는데요, 저를 제외하고 90%가 교사였습니다.
'샘'이란 말이 입에 붙은 호칭이라 제게도 '샘'이라고. 그래서 때마다 그랬죠.
"저 선생님 아닌데요?(__+)"
결국 선생님들은 저를 '안(no)샘'이라고 불렀습니다.

제가 어딨는줄은 보이시나?(' ' ):




여행에서 통역을 했던 유학생 xuan의 사촌동생들입니다.
아직 베트남은 1번국도도 완공되지 않았고
또 끝에서 끝까지 버스로 꼬박 40여시간이 걸리는 땅을 가진 탓에
여행이나 친척을 방문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합니다.
xuan도 13년만에 이모를 만났다고 하네요.
이런 부분부분이 여행에서 느꼈던 안타까움이었습니다.




후에(hue)에서 밤에 허름한 배를 띄워놓고 민요를 들었습니다.
배라기보다 그런걸 '바지선'이라고 그러나? 땟목같은 배말입니다.
노래도, 강바람도 좋은 밤이었죠.

얼굴이 크고 각지고 허연 것이..(__ ):




후에(hue)에서 뚜둑(tuduck)황제묘를 둘러보다가 발견한 미모사를 찍는 장면을 어느분이 찍었네요.
미모사, 건드리면 움츠러드는 풀 말입니다.

덩치가 장난이 아니네요.(__ ):
여행 내내 저러고 쪼그리고 구기고 그렇게 사진을 찍었죠.




메콩(mekong)에서 델타(delta)투어를 하면서 다른 배에 탔던 분이 찍으신 사진입니다.
개인적으로 제일 맘에 드는 여행사진입니다.

얼굴도 동글, 선그라스도 동글.. 동글동글..(' ' )



베트남.
베트남..

miss vietnam...

여기서 'my traveling'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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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닥s
TAG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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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 도착해서 며칠은 그런 생각을 했다.
'두번은 오지 말자.'
그런데
베트남을 떠나오면서는 이 땅과 어떻게든 인연(因緣)을 맺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진정리에서부터 시작한 일까지
빠져드는 나를 제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펼친 책, <LOVE>


이 책을 펼치는 순간, 인연(因緣)이 시작된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의 프롤로그로 '하필이면' Kim Phuc의 글이 있었다.


베트남의 비극, 그리고 한 장의 사진이 나를 전쟁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나의 진짜 이야기는 이 책의 이야기들처럼, 사랑에 관한 것이다.

식구들과 함께 장으로 보러 가거나 공항에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보면 사람들이 "그 유명한 사진 속의 주인공 아니신가요?"하고 물어올 때가 많다.  그들은 늘 호기심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호의적이다.  나는 그 사람들을 모르는데 그들은 나를 잘 아는 것 같았다.  한 장의 사진 때문이다.  화상을 입고 발가벗을 채 울면서 베트남의 길을 내달리던 소녀의 사진 말이다.  "네, 제가 그 사진 속의 소녀예요."  나는 웃으면서 대답한다.  그러면 그들은 나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 사진이 자신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서로를 용서하는 데 얼마나 도움을 주었는지, 어떻게 사랑을 가르쳐주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그럴 때면 내 사진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사랑에 관한 것들이다.  어머니가 만들던 음식 냄새, 7남매가 함께 살던 커다란 집, 큰아버지의 웃음소리, 안뜰에 있던 과일 나무들, 학교 친구들, 내 이름 '푹'은 '행복'이라는 뜻이다.  나는 행복한 아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것이 변했다.  우리 마을에 전쟁이 닥쳤다.  우리 가족은 유일하게 '안전한 '피난처였던 근처의 답 안에 사흘 동안 숨어 있었다.  배행기가 그 성소를 폭격하려하자 군인들이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어서 나와!  뛰어!"  나는 겁에 질려 사폰들과 함께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폭탄 네 개가 터지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네이팜탄이 사방에서 터졌고 내 몸에 격렬한 불꽃이 옮겨 붙었다.  내 옷과 살갗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기적처럼 발에는 불이 붙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달릴 수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농 콰!  농 콰!"  너무 뜨거워요!  너무 뜨거워요!

1972년 6월 8일의 일이었다.  나는 아홉 살 소녀였다.

AP통신의 닉 옷이 그날 길을 내달리던 내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참으로 극적인 순간에 운명이 우리를 함께하게 했다.  이튿날 내 사진을 전 세계 시눈들의 1면에 실렸고 세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들은 전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가 폭력에 말려든 모습을 본 것이다.  사진은 전쟁 중에는 어느 곳도 안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 사진은 베트남 전쟁뿐만이 아니라 전쟁 자체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을 바꿔놓았다.

그 사진을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런데 거기서 끝난 게 아니다.  그 사진작가는 내 생명을 구했다.  닉 웃은 그저 자기 일에만 충실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도울 줄 아는 사람이었따.  그는 사진을 찍자마자 카메라를 내려 놓더니 나를 안고 인근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것은 사랑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사랑'하면 뭐가 떠오르지?"  친구가 내게 묻는다.  나는 대답한다.  내 삶을 바꿔주신 하느님의 사랑, 자족의 사랑, 나를 치료해준 의사들의 사랑, 자유와 용서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 아이들의 너무나 아름답고 강인하고 기쁨이 넘치는 사랑, 넓은 바다의 사랑, 내 아픈 살갗을 진정시켜준 서늘한 날씨의 사랑, 사화의 사랑, 웃음의 사랑, 기도의 사랑, 핑크빛 사랑, 어디에서든 서로를, 특히 우리의 희망이고 미래인 젊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는 사랑, 진지한 것들에 대한 사랑, 장난스러운 것들에 대한 사랑….

이 책에 실린 수많은 어머니, 아버지, 할머지, 할아버지들의 얼굴에서 나는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본다.  두 분은 지금 캐나다에서 우리와 함꼐 살고 계신다.  두 분 역시 손자를 보시게 되었다.  우리 두 살배기 아들에게 이 책에 실린 몇 장의 사진들을 보여주자 그애는 아주 즐거워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사진 속의 사람들을 알기라도 한 긋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실린 사진들은 여러 나라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단짝 친구들의 모습니다.  그들의 눈을 보면 그들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거리에서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처럼 나 역시 말할 수 있다.  "그 예쁜 아기를 낳은 어머니 아닌가요?  난 당신을 알아요!"

이 사진들을 찍은 작가들은 틀림없이 굉한한 연민을 지닌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아름다운 사진을 찍을 수 없었으리라.  우리는 이런 사진들을 찍은 작가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들도 분명 닉 웃처럼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카메라를 내려놓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18 쪽과 119쪽의 사진에서 나는 정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머리카락이 하나도 남지 않은 아이와 간호사.  그 아이는 암을 앍고 있는 것 같다.  간호사는 아이에게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있다.  그려는 나를 무척이나 아껴주었단 나의 간호사 홍Hong일 수도 있다.  사이공의 바스키 화상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때 나 역시 머리카락이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화상 때문에 윗도리는 입을 수 없었다.  휘발유를 젤리처럼 만든 네이팜탄은 너무 잔인한 것이다.  그 폭탄은 살갗 아래 깊숙한 곳까지 태우는데, 끓는 물보다 더 뜨겁다.  매일 아침 간호사 홍은 특수 욕조에서 나를 씻겨주었다.  피부를 부드럽게 해서 좀더 쉽게 벗겨지도록 하려는 것이었지만, 나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까무러치곤 했다.  그렇게 정신이 들락날락하면서 몇 달을 보냈다.

이제 나는 어느 할머니의 발을 주물러주는 수녀의 사진을 보고 있다.  접촉은 사랑을 치료하는 힘이다.  내가 회복되어갈 무렵 식구들은 매일같이 나를 찾아와 손가락 구부리는 운동을 시켜주었다.  내 왼속은 갈고리처럼 굽어 있는데다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레 다뤄야 했다.  나중에는 혈액 순환이 잘 되도록 내 등을 주무르고 두드려주었다.  내가 그 고통스런 재활 운동을 초기하려 할 때마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킴.  불구가 되고 싶지 않으면 운동을 해야만 한다."  나는 어머지를 사랑했고 어머니의 말씀을 따랐다.

학교에 다닐 때 나도 다른 여자애들처럼 짧은 소매 셔츠를 입고 싶었다.  나는 종종 두 팔을 뻗어 들여다보곤 했다.  오른팔은 완벽하고 아름다웠지만 등과 왼팔은 심한 훙터로 일그러져 있었다.  왜 하필 내가?  나는 묻곤 했다.  나는 그저 '보통'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언젠가 여자애들이 우리 반의 어떤 남자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애는 잘생겼지만 손에 화상이 있었따.  한 여자애는 그 흉터 때문에 그애는 결코 자기의 남자친구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애의 흉터는 아주 작았는데도 말이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 흉터와는 전혀 달랐다.  그 여자애의 말이 내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는지 여러분은 짐작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내 흉터 때문에 그 어떤 남자도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와 결혼하지 않을 꺼라고 나는 확신했다.

나는 모두 열일곱 번의 수술을 받았다.  1984년 독일에서 마지막 수술을 받을 후에야 목과 어깨를움직일 수 있었다.  2년 뒤 나는 대학에 진학하며 쿠바의 하바나로 갔다.  거기서 나는 같은 베트남 학생인 토안을 만났고, 그는 내 잠자 친구가 되었다.  그는 내게 수영을 가르쳐주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불에 덴 살갗 때문에 나는 햇빛을 피해야 했던 것이다.

낭만적인 사랑, 결혼에 이른 사랑, 나는 이 사진들을 보면서 미소를 짓는다.  어렸을 때 흉터 때문에 어떤 남자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 기억하는가?  그 새각은 틀렸었다.  토안과 나는 사랑에 빠졌다.  1992년 9월, 친구들은 하바나에서 아름다운 결혼식을 마련해주었다.  우리의 새로운 삶을 향한 여행은 8년 전 캐나다로 도망치듯 떠나오면서 시작되었고, 그것은 우리 아이들을 위해 간직해둔 이야기가 되었다.  엄마와 아빠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단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였고 자유가 있었지, 그러니까 우리는 모든 걸 가진 셈이었단다.

나는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다.  캐나다에서 살게 된 뒤로 오랫동안 아는 그 사진을 잊고 싶었다.  그 사진은 어이든 나를 따라다녔다.  나는 새로운 나라에서 가족들과 함께 조용한 삶을 누리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진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영국 기자들이 끝내 나를 찾아냈다.

그 무렵 놀라운 일이 생겼다.  낸시 포콕이라는 소중한 친구를 알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었던 낸시는 퀘이커 교도이자 평화 운동가였으며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분은 내 인생에 정말 큰 영향을 끼쳤다.  여든다섯의 나이에도 낸시는 사람들을 돕고 망명자와 새로운 이민자들에게 자기 집을 내주는 등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  그분은 내가 그 사진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오히려 그 사진을 가지고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결국 나는 그 사진을 내 삶에 허락된 놀라는 선물로 받아들였다.  내 삶을 향한 하느님의 계획의 일부로 말이다.


그 사진 덕분에 나는 평화 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래서 1997년 유네스코 친선대사로 임명되어 평화 문화를 위해 일해오고 있다.  그리고 역시 그 사진 덕분에 전 세계를 여행할 수 있었다.  바로 사랑을 주제로 한 이 사진들의 무대가 되는 나라들이었다.  뉴질랜드, 아일랜드, 한국, 프랑스 등에서 나는 대통령과 수상, 중요한 사업가들, 유명한 음악가들과 멋진 보통사람들을 만났다.

인간의 마음은 선하다.  어디서나 사람들은 평화를 원한다.  전쟁을 끝낼 방법을 찾으며 평화로운 세상에서 가족과 살고 싶어한다.
내 사진은 역사의 우연이었다.  우연하게도 한 사지기자가 그 실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자신의 고통을 기록해줄 사진기자를 만나지 못했던 수백만의 무고한 희생자들을 결코 잊지 못한다.  특히 어린아이들을 잊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나는 전쟁에서 희생되는 아이들을 돕기 위한 자선 단체인 '킴 재단'을 만들었다.  킴 재단은 시카고와 토론토에 본부를 두고 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예수님은 말했다.  나는 마음속에 증오를 품어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없다.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내가 당한 일이 대체 주구의 잘못이냐고.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진심이다.  나는 용서했다.  하지만 인지는 않는다.  똑같은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몇 년 전 나는 워싱턴DC에 있는 베트남전 퇴역 군인 기념관을 방문했다.  나는 수많은 전사자들의 이름을 보았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나는 물었다.  왜 그들이 고통을 받아야 했나?  나는 많은 퇴역 군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사람이 군중 속에서 나와 자신을 소개했다.  존 플러머라는 이름의 그 퇴역 군인은 내가 화상을 입던 날 우리 마을인 트랑 방 공격 계획에 함여했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으며 자신의 삶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용서를 구햇고 나는 그렇게 했다.  그도 나와 같은 희생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헬리콥터 기관총 사수였던 마이크는 끔찍한 악몽에 시달린다고 말했다.  말하는 내내 그는 울었따.  "지금까지 줄곧 그 사진이 메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당신을 직접 만나고 당신이 저를 용서해주시다니요.  꿈만 같은 날입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그런 특별한 순간을 많이 경험한다.  모두가 사랑의 순간들이었다.

나는 우리 모두가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신의 피조물이라고 믿는다.  여러분이 손에 들고 있는 이 책은 우리 인류가 해낼 수 있는 사랑을 보여준다.  이런 사랑이라면, 분영 어렵지 않게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가정에서, 그 다음엔 직장에서, 나라 전체에서 시작해야 한다.

내가 여러분과 함꼐 나눈 기억들은 이 책에 실린 사진들에 자극받아 떠올느 것이다.  이 알므다운 사진들을 보녀서 여러분 자신의 예 기억들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여러분의 미래 기억들고 만들어보면 좋을 것이다.

한 장의 사진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질 수 있는지 잊지 말기를, 그 어떤 폭탄보다도 강력한 사랑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킴푹 Kim Phuc[앤 베인Anne Bayin과 나눈 대담에서, 캐나다 토론토Toronto]
도서출판 이레 <LOVE>중에서



Kim Phuc and photojournalist Nick Ut. After taking the famous image of Kim, Nick put down his camera and helped to save her life.


여기서 '행복한 아이, Kim Phuc'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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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닥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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