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이, 아니 선미 마을은 가이드북엔 나와있지 않다. 내가 정리를 위해 빌린 가이드북 <세계를 가다>, 이것도 나름 이름있는 가이드북 시리즈다, 뒤쪽에 2도 컬러로 한 단락쯤 나와있다. 그래서 방현석의 여행기에 나온 단 한 줄, 끄앙응아이로 들어가 갈림길에서 왼쪽길을 따라 간다,는 글을 보고 찾아갔다.

다낭 가까이 꼭 가볼만한 곳으로 호이안과 미선 유적지를 꼽는다. 다낭을 출발하며 미선 유적지냐, 선미 마을이냐. 갈 곳을 정하는데 의견의 갈림이 있었다. 결론은 미선 유적지는 다시오면 갈 수 있는 곳이다, 여행지니까. 하지만 선미 마을은 쉽지 않은 곳이다라는 이야기들이 오갔고, 가보고 싶다는 의견이 다수인 가운데 미선을 꼭 가보고 싶다는 의견을 가진 이는 없어 선미 마을로 가게 됐다.




선미 마을이 어떤 곳이냐고? 베트남에 대해 쌀국수, 아오자이, 하롱베이 외 조금만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이라면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미군에 의한 '미라이 민간인 학살'을.

선미는 미라이mylai의 베트남 지명이다. 미라이는 미군이 임의대로 구획을 나누어 자기들 편의대로, 군사용으로 나눈 지명이다. 베트남 지명 발음이 쉽지 않아 그랬다는 이야기들도 있다. 예를 들면 우리 지명에 노근리가 있다고 치자. 미군이 발음하기에 쉽지 않음으로 자기들에게 익숙한 노엘 등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노근리를 그렇게 불렀다는게 아니라 예를 들자면. 그래서 선미 마을 인근 지역은 미라이1, 미라이2, 미라이3 등 이렇게 나뉜다.

선미 마을에서 일어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네이팜탄에 화상을 입고 뛰어가는 어린 킴푹의 사진과 더불어 베트남전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그것이 얼마나 비양심적이며 반인류적인 전쟁인가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런 계기들이 쌓여 전세계적으로 반전운동이 일어났고 이런 흐름과 베트남 저항으로 전쟁은 끝이 났다.




선미 마을터에 지어진 이 기념관은 선미 마을 민간인 학살에 대한 정보가 있는 전시관도 있고, 당시 마을터의 흔적을 그대로 살려두었다. 그리고 이런 총탄의 흔적까지도.





기념관에 가면 단체의 경우 영상을 보여준다. 미군에 의한 선미 마을 민간인 학살에 대한. 그 영상은 베트남어, 불어, 영어 버전이 있다. 영상에 대한 글을 읽기도 하였고, 또 선미 마을에 대한 글을 읽기도 하였기 때문에 그림과 같이 보면 대략 이해가 간다, 일행은 영어 버전을 봤다. 그런데 같이간 분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을듯. 그래서 각자가 느끼는 공포(또는 분노)의 정도가 달랐다. 영상을 보는 동안 지루해하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집으로 돌아와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그 영상의 한국어 버전을 만드는 작업을 하였다. 번역과 자막이 작업이 전부였지만.

나와 우리라는 단체의 도움으로 영상을 한국으로 가져왔다. 인편으로 가져오는데만 거의 1년이 걸렸다. 베트남에 가는 사람은 많지만 선미 마을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사실, 반 년만에 한국에 가져왔으나 어처구니 없게 pal변환을 부탁했던 후배가 지하철에서 잠들었다 급하게 내리다 두고 내려 잃어버렸다.(ㅜㅠ )). 다시 가져와 한글 자막을 넣어 다시 보냈다. 그때는 아무의 도움도 빌리지 않고, 직접 변환했다. 그 뒤 내가 베트남을 다시 갈 기회가 없어서 그 영상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불행히도 그 기념관은 홈페이지 같은 것도 없다.
















당시의 방공호. 아이들의 키높이다.



기념관 내 마을터는 당시의 집터를 그대로 두었다. 재현이랍시고 어설프게 만든 집들이 있었다면 내가 받은 강렬함이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내버려둔, 더 이상은 사람이 살지 않는, 하지만 시간이 흘러 초록풀이 뒤덮은 집터가 나에게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전시관의 일부에서 영상을 보고 나와 가이드와 함께 마을터를 둘러보았다. 이 가이드는 지역 주민이다. 이 지역 출신인데, 일반적인 설명이 있고서 사람들이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물론 그 질문의 강도는 셌다, 일행들의 대부분이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다보니. 답을 하는 가이드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분명 이 가이드는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일텐데 말이다. 베트남어를 모르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이 도랑은 예전부터 있어오던 것으로 마을을 가로지르는 농수로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선미 마을 학살 당시 이 도랑은 핏물이었다는 가이드의 설명. 무성하게 자란 물풀이 무섭게 느껴졌다.







마을터를 둘러보고 사진과 자료를 보여주는 전시관에 들어갔다. 설명을 보던 중 무엇인가를 발겼다. 그 전시관의 설명은 우리가 베트남 전쟁이라고 부르는 전쟁을 America's war in vietnam이라고 쓰고 있었다.

어떻게 이름짓고 부르는가에 그에 대한 인식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 봤을때 베트남전쟁에 대한 베트남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나도 글을 쓰면서 가능하면 '미국에 의한 전쟁'이라고 쓰려고 노력한다. 물론 습관적으로 써버리는 말들도 있지만.




그렇다면 선미 마을 민간인 학살의 내용은 어떠했길래 그렇게 큰 파장을 불러 있으켰는가. 500여 명이 조금 넘는 마을 주민 중 미군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 마을엔 507명의 민간인이 있었고, 이들 중 504명이 죽었다. 단 3명이 살아남아 그 현장을 증언했다.

미군이 마을에 들어와 찾았던 것은 베트콩이었다. 베트콩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당시 마을에 있었던 대부분은 아이들과 노인, 그리고 여성이었다. 이는 나이와 함께 쓰여진 사망자의 명단을 보면 알 수 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베트남식 이름에 '티'thi라는 것은 여성의 이름에 잘 쓰는 일종의 중간 이름middle name이다. 베트남친구 투항의 풀네임도 응웬 티 투항이다. 학살당한 많은 이의 이름에는 thi라는 글자가 분명하다.












이 나무 부조도 어린 킴푹의 사진만큼이나 유명한 사진, 미국에 의한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사진을 형상화했다.



선미 마을의 학살을 살아서 증언한 세 사람의 생존자의 사진이 전시관에 걸려있었다. 이름을 써두었는데, 찾을 수가 없다. 이 사진 속의 할머니가 바로,



이 할머니다.

할머니는 마을을 떠나지 않고 그 때, 학살이 일어났던 때,도 그랬던 것처럼 마을터에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손녀와 먹을 수 있는 풀을 뜯으며 말이다.


+ 기록에 의하면 선미 마을에서 미군에 의해 학살당한 베트남 민간인의 수는 504명이다.  그리고 이날 미군도 한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마을에서 미군이 다쳤으니, 베트콩이 있었던 게 아니냐고?  단 한 명의 부상자인 미군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 학살의 현장을 견딜 수 없었고 그 현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쏘았다.

좀 더 적극적으로 학살을 막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면 그 미군은 미군의 총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군인이니까.  자신의 발을 쏘았던 그 미군은 살아 남아 그날을 증언하는 또 한 명의 증언자가 되었다.

그날 선미 마을에 있었던 사람human은 마을주민 507명과, 그 중에 504명이 죽었다, 자신의 발을 자기 총으로 쏜 한 명의 흑인 병사뿐인 것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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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안은 베트남다운 기념품을 사기에 딱 좋은 것이다. '베트남다운 기념품'이라고 쓰고 보니 이런 표현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인지 모르겠다.
베트남 수공예품을 사기 좋은 곳으로 정정. 물론 같은 물건들을 호치민 시티에서도 살 수 있지만, 가격대비 종류대비 호이안이 낫다. 호이안이 더 좋은 것은 그런 기념품을 만드는 가내 수공업형태의 공장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전시겠지만, 그 전시가 그렇게 좋아보일 수 없다. 이것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구석이 있다. 어린이 노동까지는 아니지만 그에 가까운 소녀들이 수작업으로 등을 만들고 직물을 짜고 있기 때문이다.



저녁과 함께 마신 333 beer, 바바바 비어라고 부른다. 방현석이 그의 책에서 설명했듯 베트남 어디를 가나 만날 수 있는 보편적인 맥주다. 탄산도, 맛도 적당해서 올때 기념품 삼아 사오기도 했다. 가끔 비라 같은 곳에서 만날 수도 있다. 그래도 바바바는 베트남에서 마셔야 제맛.



다양한 맥주를 먹어본다는 취지에서 시켜본 타이거 비어. 그런데 시켜놓고 보니 싱가폴 맥주였다.



맥주 두 캔 비우고, 그것도 빈 속에 밥대신 마신 맥주라 두 캔에도 알딸딸하게 취한다. 그렇게 본 수공예 등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소녀들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말이다. 가져올 수만 있다면 하나쯤 사고 싶었지만, 배낭족이라 이런 기념품은 불가. 나는 언제쯤 이런 것들을 여행 기념품으로 살 수 있을까.













호치민 시티는 모사라고 하나, 이름난 그림을 베껴 그린 그림이 기념품으로 유명하다. 호이안은 이름난 그림은 아니고 토속적인 그림들을 많이 팔고 있었다. 혹여 내가 모를뿐 베트남에서는 이름 있는 그림이 아닐까? 알 수 없군.











다낭에서 출퇴근하며 이틀동안 호이안에서 본 것이라곤 올드 하우스가 전부지만 후에만큼이나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다. 작은 골목, 그리고 골목안의 작은 호텔들이 이뻤다. 그 호텔들을 보며, 나도 담엔 꼭 저기에 묵을꺼야고 다짐을 했던.

+ 여행에서 동행을 했던 김남기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호이안에 다산초당 같은 문화관을 만들고 싶으시다고.  한옥을 지어 다산 정약용을 테마로 삼아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으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만큼 호이안은 옛것이 고스란히 남아 멋스러운 도시다.  김남기 선생님이 그런 집을 지으시면 꼭 와서 묵겠다고 했다.  아니, 거기 취직시켜 달라고.  그렇게라도 머무르고 싶은 도시다.

김남기 선생님은 지금도 남양주 다산 유적지 인근에 살고 계신다.  남양주에 이렇게 저렇게 가볼 일이 가끔 생길 것 같아서, 가게 될 일이 생기면 그 댁에서 하루 묵겠다 마음을 먹었는데 그 마음 먹고 남양주에 갈 일이 없다.  잘 계시는지 모르겠다, 연락 않은지 2~3년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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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낭danang. 다낭은 중부지역의 중심지라 할 만큼 큰 도시지만 우리에겐 조금 다른 의미로 인연이 있는 도시다.



한국과, 정확히 말하면 한국군과 악연이 있는 곳인데 겉으로 보기엔 평화롭기만하다. 한 번 제대로 둘러보고 싶은 곳이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호이안hoian을 둘러보기 위한 징검다리 정도의 방문이었다. 호이안은 베트남에서도 이름난 관광지라 숙소잡기가 쉽지 않아 큰 도시인 다낭에 숙소를 잡고 호이안으로 출퇴근을 하였다. 기회가 되면, 다음에 꼭-.



호이안hoian을 나는 사람들에게 한국의 안동이라고 소개해줬다. 가만히 생각하면 안동과는 또 다른 것 같다. 최근 몇 년 안동에 한 해 한 번씩 갈 기회가 있었다. 안동도 한국의 다른 지역들처럼 변화하고 있는 도시일뿐 예전에 가졌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다시 수정을 하자면 한국의 경주? 경주라고 크게 다를까만은.

호이안은 접근이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오히려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 접근이 쉬운 면도 있겠다. 호이안의 터미널에 도착하면 관광안내센터가 있다. 이곳에 가면 호이안 여행정보도 얻을 수 있고, 필요한 티켓을 살 수도 있다. 기억은 잘 안나지만 여러곳을 둘러볼 수 있는 티켓 묶음을 사는 것이 개별 입장에 요금을 지불하는 것보다 저렴하다. 우리 일행은 다수여서 무료로 관광안내를 받을 수 있는 가이드까지 제공(?) 받았다.




호이안은 16~17세기 교역의 중심지였다. 상거래가 활발한 도시였고, 그래서 외국문화의 유입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처음 간 곳은 복건회관.




이름만으로도 알겠지만 화교들이 모이는 곳이다. 과거에도 그랬으며 지금도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아이들 너무 이쁘지 않나. 복건회관에서 만난 아이들이다. 외국인들을 구경하는게 일상인데도 주변을 따라다니길래 세워놓고 찍었다. 사진에 보이는 미소도 수줍지만, 찍은 사진을 액정으로 보여주자 더 수줍은 미소를 보였다. 이쁜 아이들.(^ ^ )



우리의 가이드. 이름은 모르겠네. 여행을 마칠무렵 일행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선물을 하기도 하였다.





호이안의 거리. 호이안에서 볼거리는 몇 개의 박물관, 올드 하우스, 그리고 외국문화의 유입 흔적을 볼 수 있는 곳들이다. 해질무렵 도착해서 볼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았다.



이곳은 일본교라고 불리는 다리다. 이 다리를 경계로 한 쪽에는 일본인 중심지역이, 한 쪽에는 중국인 중심지역이 있었다고 한다. 이 다리는 일본인들이 만들었다. 일본 느낌 물씬?



호이안에서 박물관 관람을 포기하고 갔던 곳은 몇 개의 올드 하우스다. 올드 하우스는 말그대로 1~200여 년 전의 집들을 그대로 보존해놓은 것들이다. 현재는 후손들이 가업을 이으며, 부분적으로 관광객들에게 공개해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추측하여 볼 때(정확히 기억이 안난다만) 떤끼tanky의 집이었다. 어부출신 화교의 집이었는데, 기억나는건 그 집 부엌에서 후손이 들려준 옛이야기였다. 한 남자의 아내를 탐했던 또 다른 남자는 남편을 눈멀게 했다. 눈먼 남편을 거두기 위해 아내는 이 집에 들어와 일을 했다고 한다. 아내는 남편을 부엌 짚더미 속에 숨겨두고 거두었는데 이 사실을 안 남자는 그 짚더미에 불을 놓았고, 아내는 그 불 붙은 짚더미로 뛰어들어 아내와 남편 모두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들을 위로하며 모시는 거라고 했던가. 그 이야기를 들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럼 그 나쁜 남자가 이 집 주인이야?'( ' ')a






관광객에게 공개하는 관광지이기도 하면서 후손들이 일상을 사는 곳이기도 했다.



어부출신 화교의 후손.



그 집에서 파는 기념품. 사람 팔뚝만해서 살까말까 한참을 고민하다 사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된다. 일본의 교토인형과 나란히 놓으면 좋은 기념품이 될텐데. 물론 나는 같은 이유로 교토인형도 없다. 여행 중엔 돈보다 짐이 늘어나는 것이 두려워 기념품을 살때 늘 망설인다.



이 집은 꾸언탕quanthang의 집. 정원이 아름다운 집으로 소개돼 있다.



실제 정원은 없다, 물리적인 공간이 좁아. 그래서 정원을 형상한 조형물이 집 중간 마당에 꾸며져 있다. 지붕의 잉어가 그렇고, 한 쪽 벽 면의 창 모양 부조가 그렇다.





수공예품을 살 수 있는 곳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합리적인 가격으로 베트남 기념품을 살 수 있는 마지막 동네였던 것 같다. 하노이-후에-호이안까지가 비교적 저렴하고, 나짱-호치민 시티가 약간 비싼 편이다.



씨바. 파괴의 여신이다. 파괴라고 해서 부정적인 눈으로 볼 것은 아니다. 여기저기 씨바는 중요한 신으로 모셔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파괴가 있어야 새 생산이 있을 수 있다는 의미다. 파괴-생산이 맞닿아 있는 셈이다.







수공예품 구입은 뒤로하고 마당에 앉아 베트남 커피를 시켜 먹으며 가이드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때 반해버렸다, 베트남 커피에. 진한 아이스라떼다. 컵이 작아서 아쉬웠다. 에스프레소 추출방식은 아니지만, 진한 커피에 달콤한 연유, 그리고 얼음을 넣어준다.

+ 다낭은 미국에 의한 베트남 전쟁때 미군 기지가 있는 도시기도 했으며 청룡, 맹호, 백마 등의 한국 군인들이 베트남으로 들어간 관문이기도 하다.  

정치(결국은 경제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한국과의 관계가 많이 개선됐다고는 하지만 그런 것들도 중부지역은 예외다.  한국군이 들어가 민간인 학살을 했던 곳이 바로 이 중부지역, 그 중에도서 중부내륙지역이다.  한겨레21이나 몇 권의 단행본에 실린 것처럼 이 지역의 어느 마을에 가면 증오비가 있다.  무엇에 대한, 누구에 대한 증오인지는 내 입에 담기 참으로 부끄럽다.

이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밝히는 작업은 참으로 힘들다.  나는 학살에 참여했던 모두를 가해자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가해자면서 피해자다.  그러나 진실을 밝히는 과정에서 가해자로 인식될까봐 그들은 진실을 숨기려고만한다.  오히려 진실을 밝히는 작업을 앞장서서 막고 있다.  베트남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조명했던 한겨레로 파월 군인들이 들어와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억울하기도 하겠지, 전쟁의 기억으로 몸과 마음이 그렇게 고통받게 사는데.   하지만 그들이 피해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먼저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  그게 순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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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에서 다낭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하이반haivan이 있다. 하이반 고개는 세계에서 경치가 아름다운 고개 몇 곳에 꼽히는 곳이라 한다. 나는 보는 눈이 없어서 그런지, 경주 남산 올라가는 것과 큰 차이를 모르겠더라. 하이는 바다고, 반은 눈인데 늘 운무가 끼어 있어 날씨변화가 예사롭지 않은 곳이라고 한다.

하이반 고개에 오르기전 잠시 쉰 곳이다. 왜 쉬는지 알 수 없었던 나는 쑤언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쑤언이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해줬다. 저렇게 물기둥이 솟을땐 기차가 오고 있는 중이니 건널목에서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해줬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아~"하고 끄덕였다. 그러나 나는 한참 뒤에 이상한 걸 느꼈다. 기차가 지나가지 않는거다. 이런, 뭐야하고 다시 물었더니 일행 중 한 사람이 화장실을 가느라 잠시 섰던 것이다. 이때 처음으로 특유의 허풍쟁이 기질을 쑤언에게서 느꼈다.(-_- );; 그는 늘 알듯모를듯한 농담을 한다.






비슷하지 않아? 남산 올라가는 구불구불한 길과. 규모가 다르기는 하다. 더 높고, 더 구불하고.



하이반 고개에 오르면 오래된 성곽을 볼 수가 있다. 높은 고개이다보니 오래전부터 군사요충지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붉은 벽돌이 베트남 사람들이 만든 성곽이다. 그 아래 시멘트는 미군이 만든 것이다. 문화유적으로서 가치가 큰 시설물인데 무식하게 시멘트로 '쳐발라' 자기들의 군사시설로 쓴 것이다. 왜 개들은 개념이 없는 걸까?(-_- )



프랑스와의 전쟁, 일본과의 전쟁, 그리고 미국과의 전쟁에서 고루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던 곳이다. 앞과 뒤를 두루 볼 수 있는 높은 지형이, 군사적인 이유로 꼭 필요한 것이었으리라. 격전지였던 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래서 위령비가 있다.





힘들게 힘들게 버스가 올라오는 모습을 보고 서둘러 셔터를 눌렀다. 부릉부릉 덜덜덜덜 그 소리를 들어야 힘겹게 올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데.

+ 하이반 고개는 경치보다 무개념한 미국을 다시 한 번 씹어주는 곳이었다.  그래도 정말 경치는 좋았다.

이때 화장실에 잠시 들렀는데 경악을 했다.  기대한 것처럼 화장실은 깨끗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경악을 한 것은 깨끗하지 않은 화장실이 아니라 내 앞에 이용한 사람 때문이었다.  중년의 백인 여성이었는데, 아마 프랑스 사람일 확률 70%다.  화장실은 좌변기였는데 좌변기에 신발자국이 고스란히 찍혀 있는게 아닌가.  그러니까 좌변기 위에 쪼그려 앉은 모양으로 볼 일은 본 모양이다.  뒷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것보다 그 위에 쪼그려 앉는 것이 더 놀라웠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일정부분 이해도 가지만 그래도…, 뒷사람 생각 좀 해주지.  나?  물 한 바가지 얻어와 끼언고 티슈로 닦았다.  신발자국만 아니었으면 그냥 물티슈로 닦고 말았을 것이다.  물티슈, 꼭 필요한 여행용품이다.  여성에겐.  나는 유럽여행을 하면서, 그러한 여행 습관을 가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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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 무 사원에서 처음으로 망굿을 먹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망굿이라고하던데, 후배들은 망고스틴이라고 하던군. 망굿은 베트남에서 먹을 수 있는 과일 중 비싼 축에 든다. 그만큼 맛은, 최고.( ♥♥)b 씹는 느낌은 부드러운 백도, 그보다 부드럽고 달다.



노점에서 먹었던 퍼. 자세히 보면 면이 둥글다. 보기만 보고 맛은 보지 못했다. 향차이가 같이 끓여져 나오는 바람에 말이지. 그래도 퍼의 다양함을 알게 된 소중한(?) 기회였다. 나는 퍼를 남겨두고 일어나 또 다른 노점에서 파는 바게뜨를 뜯어 먹었다. 베트남 노점에서 바게뜨를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바게뜨는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아침에 노점에서 퍼를 제대로 먹지 못해서 무척 배가 고팠다. 후에로 들어가면서 호텔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사람들은 전골류의 음식을 시키고, 나는 후에의 맥주 후다 비어fuda beer를 시켜 마셨다. 전골류를 얼마 먹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후다 비어의 맛은 김빠진 맥주맛, 탄산이 적은 프리미엄 맥주였다. 그래도 맛나게 마셨다. 내가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밥을 먹는 동안 호텔주변을 산책했다. 이상한 차, 침대칸이 있는 차를 발견하고 신기해서 찍었다.



호텔과 접한 도로에 막 나서는테 이 차가 지나가는거다. 나중에 여행을 하면서 더 많이 보게됐지만, 베트남엔 한국에서 쓰던 중고차들이 많이 다닌다. 처음엔 '그래도 도색은 새로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럴 필요가 있나 싶다. 이런차를 만나면 반갑기도 하고, 이 낡은 버스들이 내뿜는 매연을 보고 있자면 걱정스럽기도 하고 그랬다.



후에 다리. 그냥 후에 다리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찾아보니 짱띠엔 다리인 것 같다, 틀려도 나는 모름. 어쨌거나 이 다리는 베트남에 다녀오고서 한 CF에서 보기도 하였고, 베트남 관련 책을 읽다보면 자주 등장한다. 후에가 마지막 왕조의 서울이었으니 그러저러한 맥락에서 가끔 등장한다. 구시가와 신시가를 가르는 홍강을 건너게 해주는 다리다.



후에 다리에 시장이 연결되어 있다. 그 시장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넓고 커서 그거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크다. 일행의 어떤 사람은 시계 배터리를 갈러도 가고, 어떤 사람은 안경다리를 쪼으러 가고, 어떤 사람은 쇼핑을 가고, 나는 또 어슬렁.

사람들과 어울려 쫌쫌이를 사먹었다. 방현석이 예찬한 쫌쫌이. 쫌쫌이는 한국에선 리치라고 알고 있는 열대과일의 비슷한, 그러나 다른 종류다. 리치보다 껍질은 얇고, 싸고 하지만 맛있는.(^ ^ )




시장을 둘러보니 이런 풍경도 있더라. 잘은 나타나지 않지만, 저 여인은 배가 남산만했다. 그런데도 좌판에 앉아 야채를 다듬는 모습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물론 이런 풍경은 우리 시장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후에에서 해볼 거리로 추천 하는 것은 밤에 배를 타는 일이다. 일행이 적지 않음으로 배 한채를 빌려 홍강을 유람했다. 그 배안에서는 민요도 들려주고 그런다. 그리고 그 끝에는 기원을 담아 불 밝힌 초를 강물에 띄어 보내는 이벤트도 있다. 다소 식상한 '관광'처럼 들리지만 민요를 듣는 것도, 네온싸인이 많지 않은 홍강의 야경을 즐기는 것도 멋스럽다. 내가 이런 사치를 누려도 되는가 싶을 정도로. 결국 사치스런 정취는 오래 가지 않았다.

한참 민요를 듣고 있는데, 발 아래서 뭔가 중얼중얼 거리는거다. 놀라서 발 아래를 보니 아이들이 배의 난간에 매달려 있다. 아이들이 배를 노를 저어와 배의 난간에 매달려 구걸을 하는 거였다. 조금전까지 느꼈던 정취는 찬물을 세례를 받은 것처럼 싹 사라졌다. 지갑 속에 잔돈을 주어도 그 착찹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이 아름답다고만 기억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베트남의 단면이었던 것이다.






다시 정취로 돌아가, 초를 강물에 띄어 보내는데 소원을 빌라고 시킨다. 내가 빌게 있나, 그냥 착찹해진 마음으로 무덤덤하게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분이 소원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민주노동당 원내진출!" 그 때는 2003년이었다.
그의 소원 덕분? 2004년 민주노동당은 국회로 들어갔다, 눈물을 흘리며.(^ ^ )




걸어서 왕궁을 찾아가다 찍은 사진. 아오자이를 교복으로 입고 있는 학생이었던 것이다. 늘어진 자락을 왼손으로 잡아 핸들을 쥐고 서 있었다. 히야..(@@ )



왕궁을 둘러보고 숙소로 잡았던 미니호텔로 돌아갔다. 사실 다시 돌아갈 필요가 없었는데, 쑤언의 권유로 후에 정찬을 먹기로 하였던 것이다. 일종의 코스 요리다. 전통음식으로 된 코스요리.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먹어보기를 권한다.



투명한 무엇인가에 싸여있는 새우였다. 찾아보니 반 봇 록banh bot loc이라고 한다. 젓갈에 찍어먹는데 신선함 그 자체다.



바나나 껍질에 쌀과 함께 새우와 어묵을 쪄낸 음식이다. 열면 아래와 같은 모습이다. 이름은 반 라 짜banh la cha tom이다.





파이라고 생각했다. 파이 또는 파전? 오코노미야끼? 이름은 반 코아이banh khoai로 내가 베트남에서 먹었던 베트남 음식 중 맥주를 제외하고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다.



처음 먹은 분bun. 분은 국물이 없는 쌀국수다. 비빔국수 생각하면 되겠다.



이건 뭐 설명 않아도 알겠지만 김치, 피클 종류다. 전반적으로 심심해서 사람들이 이 찬을 맛나게 먹었지만 이 찬 없어도 후에 정찬은 먹기 좋다.



후식으로 나온 음식. 이건 찾아봐도 이름이 없네. 반 라 짜가 어묵이나 새우가 들어가 있었는데 이건 고구마 같은 달콤한 게 들어 있었다.



후에 정찬을 지휘해서 만든 아주머니다. 그 사회에서도 장인이라고 대우를 받는 듯. 덕분에 베트남에서 술로 배불리지 않고 정말 맛있는 식사를 했다.

+ 후에는 참 옛스럽다.  물론 그 옛스러운 멋 뒤에는 무너진 왕궁 터와 여행객들에게 구걸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런 뒷면이라는 것은 어느 사회를 가도 있는 것이지만.  베트남을 참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하게 해준 곳이면서, 사회주의인데 왜 구걸하는 아이들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해준 곳이다.  아름다운 정취 만큼이나 처참한 과거와 오늘이 잊혀지지 않는 곳이다.  그래도 기회가 되면 꼭 다시 가 밤배를 타고 음악을 듣고 싶고, 후에 정찬도 다시 먹고 싶다.  내가 너무 이중적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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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hue는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원조의 서울이었던 도시다. 베트남 친구들은 후에라 하지 않고, 훼라고들 발음한다. 나는 그냥 익숙한대로 후에라고 쓰겠다. 후에는 베트남을 다시 간다면 어디를 가겠니?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꼭 대답에 넣을 도시다. 아름답고, 처참하기 때문이다.

이 탑은 후에 근교에 있는 티엔 무thien mu 사원의 탑으로 후에의 상징 중 하나다. 후에의 기념품에 꼭 들어있는 그림이다. 이 사원의 탑을 사랑의 탑이라고 한다고 들었는데, 그 이유는 잊어먹었다. 안될 일이야.(__ );;




티엔 무 사원 입구에 있는 상이다. 한국의 사찰에 있는 사천왕과 같은 역할을 하고 모습도 비슷하다. 내가 카메라를 들이댄건 속눈썹 때문이다. 속눈썹이 실제 동물털로 되어 촘촘하게 되어 있었다. 신기하지 않나.





티엔 무 사원에서 또 유명한 것은 바로 이 차다. 포토 저널리즘 책이나 미국에 의한 베트남 전쟁에 관한 책을 본 사람은 한 번쯤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승려가 가부좌로 분신한 사진을. 그 승려는 티치 광 둑이라는 승려로 이 사원에서 이 차로 호치민 시티(당시에는 사이공)으로 가서 미국의 비호 아래 있었던 고 딘 디엠 정권의 부패에 항의를 표하기 위해 분신을 하였다고 돼있다. 그런 차다. 그 사진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 충격은 내게도 마찬가지.





티엔 무 사원의 어린 승려들.



카이딘khai din 황제의 묘다. 동양과 서양이 뒤섞여 있는 느낌인데, 신기한 것 아무래도 검은 빛깔의 돌들이다. 카이딘 황제에 대해서는 아는게 없고, 단지 사치스런 묘를 보아 인민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정도의 생각만 들었다.







사치스러움, 좋게 말하면 화려함은 묘 내부에 가면 극에 달한다. 칠보와 스테인글라스를 오락가락하는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묘 내부.



도자편으로 장식한 부분. 가우디가 동양의 어디선가 모티브를 따왔다는데-, 하면서 이런데서 모티브를 따간건 아닐까 우리들끼리 쑥떡쑥떡. 개인적으로 스테인글라스보다는 이게 낫더라.(-_- )



사진 한 귀퉁이에 나온 쑤언.(^ ^ )



여긴 뚜둑tu duc황제의 묘다. 이름이 그렇다고 웃었는데, 하여간 그렇다. 뚜둑 황제의 묘에서 유명한 것은 문 앞에 들어가면 바로 나오는 큰 연못이다. 연못 둘레의 풍경이 좋다.
이 사진을 찍은 곳은 후궁들이 머물렀던 곳인가, 매장했던 곳인가 그렇다. 아마도 사진의 이름을 봐서는 후자일 가능성이 많겠다.

이 뚜둑 황제의 묘로 들어가면서 처음 내국인(베트남인)과 외국인의 입장료 차이를 알게 됐다. 베트남에서 외국인은 5배의 요금을 내야한다. 5배라고 하면 깜짝 놀랄 배수지만 실제 금액은 그리 크지 않다. 가난한 여행자들이 그런 이유로 부담스러워하거나 싫어하는데, 나는 웬지 그런 요금율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황제를 기리는 사원으로 연결된 목조건물동에 들어가면 이런 게 있다. 황제 옷을 입고, 자리에 앉아서 사진을 찍어보는. 한국에도 저런게 있지?





베트남 친구 쑤언. 다른 사람도 아니고 쑤언이 왜 이런 옷을 입고 사진을 찍고 싶어 했을까가 아직도 의문이다. 어쨌든 자기나라 옷이라 그런지 가장 잘 어울리는 것도 같고. 이런저런 정황과 상관 없이 쑤언이 참 이쁘게 나온 사진이다.



황제의 의자 앞에는 사진찍는 사람들과 여행 중 잠시 앉아 쉬어가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한 편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책을 열심히 보는 아이가 너무 이뻐서 한 장. 무슨 책을 보고 있었을까?



뚜둑 황제의 묘를 거닐다 발견한 미모사. 방현석의 책에도 나오는 미모사다. 방현석의 책에는 그런 구절이었다. 숲을 향해 볼일을 보았는데, 움직임이 없다고 생각한 식물이 움직여 당황했다는. 한 번쯤 봤을지도 모르겠다, 만지면 확 오므라드는 잎을 가진 식물. 그런데 그런 미모사의 베트남 이름이 숙녀풀이라고 한다. 방현석의 말인즉 숙녀풀에 대고 볼일을 보았으니 그 풀들이 얼마나 놀랐겠냐는.(^ ^ );;



후에의 원조 왕궁으로 들어가는 다리.

이날 오전은 여행팀과 헤어져 혼자서 홍강을 걸었다. 차만 타고 이동한 여행이라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내겐. 걸어서 홍강을 따라 왕궁으로 갔다. 어슬렁 구경하다보니 약속한 시간보다 늦어 일행은 이미 왕궁으로 들어간 뒤였다. 혼자서 매표소에서 표를 사려고 줄을 섰다. 어떤 사람이 와서 말을 걸었다. "니혼진데스까"였다. 호객 행위를 하려는게 아닐까 싶어 "no"라고 건조하게 말했더니 아주 미안해 한다. 그 사람은 일본사람이었는데 혼자 여행하는 일본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은데 신기해서 말을 걸었다-는, 내용의 말을 한 것 같다.(-_- );;






들어서는 입구는 왕궁이다 싶은데 들어가보면 그런 생각이 사라진다.







부분적으로 복원된 곳들이 있기는 하지만 왕궁이라고 불리는 곳의 대부분은 왕궁 터라고 불러야 맞다. 건물은 없고 프랑스와 미국에 의한 폭격에 무너진 궁터가 전부다.















과연 뭐가 a variety of beautiful structure인지 생각하게 되는 곳이었다. 그렇게 표현하고 돌에 새긴 사람들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화를 고철 폭탄으로 없애버린 사람들을 탓하는 것이다.
친구와 쾰른 돔을 보러 간적이 있다. 친구 말이 독일 사람들은, 쾰른 사람들은 연합군이 쾰른 돔을 없애버리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해한다고, 물론 그 감사는 많은 부분이 반어겠지만. 쾰른 돔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설이 파괴됐다. 전쟁이라는 시간적 물리적 공간은 정말 무지의 극치다.








+ 무너진 왕궁 터를 왜 복원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럴 만큼의 경제적 여력이 없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일지도 모른다.  문화유적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것은 상당히 많은 돈이 든다.  그 만큼의 돈이 없는 문화유적을 보유한 나라들은 입장료만으로는 유지할 수가 없어 결국은 그 관리권한 자체를 팔아넘긴다.  세계 많은 문화유적의 관리권이 일본이나 초국적 자본에게 넘어갔다.  앙코르왓은 일본에게 넘어갔다.  

무너진 왕궁 터를 보면서베트남의 의도였던 그렇지 않던 나는 더 강한 임팩트를 받았다.  그렇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울분과 같은 임팩트말이다.  한마디로 "개념 없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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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꼭tamcoc을 가리켜 사람들은 육지의 하롱베이라고들 한다. 하롱베이는 '하늘 가득히 사랑을~'하며 나오는 항공사 광고에서 황포돛단배가 나오는 곳이다. 바다의 섬들이 용이 승천하는 모양이라고 하롱베이다. 해룡이 아닐까, 아니다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어쨌거나 탐꼭은 그런 하롱베이와 모양이 비슷하여 육지의 하롱베이로 불린다.



탐꼭에 가서 여러 가지로 놀랬다. 처음 놀란 것은 비포장 도로를 달려 그곳에 갔는데 생각보다 큰 관광지가 나와서 놀랬다. 그리고 많은 뱃사공들에 다시 놀라고.



근데 뭐랄까, 그곳의 풍경은 내가 머릿속에 그렸던 베트남의 풍경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농(갈대로 만든 베트남 모자)을 쓰고 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작았다. 치열한 흥정의 장이었지만 아무런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나에게는 단지 여행지다운 풍경으로만 다가왔다. 흥정중인 그들의 표정은 해맑기만 하고.







찾아오는 관광객보다 기다리는 사공이 더 많은 것 같아 미안했다. 그리고 그들보다 무거운 우리 자신도. 노 젓기 얼마나 힘들었을까. 사실 이런 마음이 시클로를 탈때도 있었다. 무거워서 미안해요.





미모의 처이. 결국, 우리는 이 처이의 미모에 반해 무엇인가를 샀던 것 같다.

흥정을 하는 사람들이 떠나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웬 아주머니와 와서 "change"를 반복해서 말하는 거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꼬깃한 천원짜리 10장을 꺼내며 10$와 바꾸어달라는 거다. 한국 사람들이 와서 그걸 팁이라고 주나보다 싶었다. 잠시 당황해서 망설이고 있는데 일행 중 품이 넓은 선생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10$로 바꾸어주셨다. 그 짧은 순간에도 바보 같이 환율을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작은 거고 그 선생님은 큰 거다. 킁.




일행은 두 명씩 나눠타고 탐꼭으로 갔다. 처음에 출발하는 곳은 강폭이 넓은데 들어가면 갈 수록 강폭은 좁아진다. 한 시간 가량 배를 타게 된다.







그림 같지? 쑤언이 탐꼭 입구에서 피리를 하나 샀다. 처음엔 삑삑거리더니 나중엔 자기가 아는 노래들을 피리로 불러주었다. 같은 배에 탄 것은 아니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피리소리를 들으며 배를 탄다는 것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만큼 좋다.(ㅜㅠ )





탐꼭은 석회동굴 아래 강이 흘러 그 강을 배를 타고 가며 구경하는 곳이다. 동굴이 장관인데, 나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동굴보다 더 인상적이었다.





배에 각종 먹을 거리와 아이까지 실고 관광객들을 기다리는 사람들. 멋진 풍경과 피리소리는 이 삶의 풍경때문에 다시 숙연함으로 바뀌었다.



배를 타고 오는데 일본인 무리를 만났다. 다들 카메라를 든 것이 해외 출사팀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들이 이렇게 해맑은 표정이기에 앞서 나도 찍혀줬고, 그래서 나도 그들을 찍을 수 있었다.

혹시 그 사람들 내가 일본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베트남에서 많이 들었던 말이 "니혼진 데스까"였다. 일본어를 몰라도 문맥적 흐름으로 그 말이 일본사람이냐는 물음인 줄은 알 수 있었는데, 문제는 그 말을 내게 걸어왔던 사람은 모두 일본 사람들이었다. 왜 그런거야.( ;; )




배에서 내려 밥을 먹으러 갔다. 작은 배, 얉은 물살이었지만 그것도 배라고 속이 일렁여서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사실 입맛에 맞지도 않았다. 에그 스크럼블 같은 달걀 조금과 춘권 한 두 개, 그리고 사이공 비어 한 병을 밥 삼아 먹었다.

이때부터였다. "왜 민양씨는 밥을 안먹고 술만 먹어요."(;; )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맥주 한 병을 시켜 반컵씩 따라 먹었는데, 사람들이 그게 너무 맛있게 보인단다. 그래서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그 팀에는 남자선생님들도 있었는데 술을 마시는 사람이 거의 없는 거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맥주 마시는 모습을 구경만했다. 그래도 꾿꾿하게 한 병씩 끼니마다 마셨다.






+ 탐꼭에서 동굴아래를 돌아나올때 어느 지점에 이르면 배가 멈춘다.  가이드북에 많이 소개되어 있겠지만, 좋지 않은 이미지로, 그때부터 테이블보 같은 수공예품 구매를 요구(?) 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다고들 한다.  그래, 그 마음도 이해는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흥정을 빨리 끝내는 것이 좋다, 여행을 기분 좋게 계속 하고 싶다면.  물론 그렇다고 제시한 가격에 덥석 살 필요는 없지만, 하노이에서 호치민까지 여행을 해본 결과 그곳에서 파는 수공예품의 가격은 비싸지 않은 축에 든다.  나중에 살 기념품 미리 산다고 생각하고, 흥정을 끝내야지 그렇지 않으면 몇 십분이고 강 한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한다.  

나는 그 상황이 기분 나쁘다기 보다는 슬프게 다가왔다.  그 상황을 함께 견뎌야 하는 쑤언의 표정은 몹시 난처해했다.  그래서라도 나는 빨리 사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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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에서 100여 km 떨어진 닝빙ninhbinh. 닝빙에서 조금 더 가야하는 탐꼭tamcoc을 가기 위해 들렀다. 미니버스를 세워놓고 가야할 길을 묻는 사이 사람들은 시장으로 구경을 나갔고, 나는 미니버스 주변을 어슬렁 거리며 사진을 찍었다.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사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야말로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시장이어서 살만 것들이 없었다. 내가 거기서 채소들 사서 어쩌겠누.



개들이 다 누워있더란. 아주 팔자 편하게. 그리서 그런 개들이 보일때마다 찍었다.



닝빙에서 탐꼭에 앞서 찾아간 곳은 빅동bichdong이다. 빅동은 돌산을 둘러 하사, 중사, 상사로 나누어져 있는 사찰이다. 쉽게 말하면 돌산을 두른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하사가 나오고, 좀더 올라가면 중사, 좀더 올라가면 상사가 나온다. 상사에 오르면 인근의 풍광을 볼 수 있다.





돌산을 오르는 계간은 동굴을 지나기도 하고 그렇다. 중사는 동굴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제 가물가물하다.(-_- );;



사회주의 국가라지만 기복신앙은 아시아 어디를 가도 같은 것 같다. 조그만 틈만 있으면 돌을 쌓고, 또 그 돌로 향을 세워 태운다. 사실 아시아만 그럴까. 방법과 모양이 다를뿐 사람사는 어느 곳이나 복을 기원하는 모습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여기가 상사다. 찍은 사진이 향이라 상사인지, 하사인지 확인 할 수 없으나 확실히 상사다. 이곳에서 사진을 찍다 많은 사진사들로부터 질문을 당했다. 왜, 관광지에 가면 있는 사진사들. 아직 카메라 휴대가 보편화되지 않은 시기라 그런 사진사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은 소니인 내 카메라를 보고 엄지 손가락을 내보이면 '저팬 넘버원'이라고들 말했다. 나는 일본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알아 듣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필름 카메라를 들고 있었고, 내 디지털 카메라 주변에 몰려들어 액정을 보며 신기해들 했다.

이제 베트남도 휴대전화 이용자가 큰 폭으로 늘어났으니 그곳에도 휴대전화 카메라로 여행을 기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겠지. 그 사진사들은 아직도 영업중일까?


+ 빅동에 올라 주변을 보면 산모양이 꼭 중국산 같다.  탐꼭도 그렇고.  중국을 가보지 않아서 중국산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중국산 모양은 그거다, ≪여명의 눈동자≫에서 최대치가 일본군 학도병에서 탈출하는 장면에 나오는 산.  논 같이 평평한 곳에 돌산이 솟아 있었다.  꼭 거기가, 거기 같다.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지만 종교를 허용한다.  프랑스 식민지 역사때문인지 카톨릭 인구도 적지 않다.  사찰 문화재들도 많지만 그 문화재들은 불교라기 보다 유교적인 것이 많다.  이는 중국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이유로 요즘 한국에서는 러시아의 고려인보다 베트남 사람들과의 국제결혼 비율이 높다.  문화적으로 비슷한 것이 많아, 비록 외모는 다르지만 유교적인 한국문화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 광고, 국제결혼-베트남,를 보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마음이 편할 수는 없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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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여행자들이 꼭 이용하는 씬까페. 신까페는 여행사다. 대중교통 수단이 있기는 하지만 편하지 않은 곳이라 근교 여행을 할때는 씬까페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예약을 하고 정해진 시간, 정해진 곳에 가면 버스를 타고 근교를 여행할 수 있다.
나는 개별여행이 아니어서 대여한 미니버스를 타고 다녔지만, 베트남에 다시 갈 기회가 생기면 이용하게 될 것 같다. 베트남 어느 도시, 어느 동네나 있는 것 같았다.

다음에 베트남을 여행할 기회가 있으면 긴 시간동안 하노이에서 호치민 시티까지 가는 열차를 타보고 싶다. 40여 시간이 걸린다. 타고 가다 내리고, 다시 가고. 꼭 그렇게 여행 할 것이다.




민속박물관 입구에 있었던 모터사이클. 베트남의 이미지는 아오자이와 자전거다. 하지만 대도시에서는 자전거를 탄 무리의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베트남의 서울 하노이보다 큰 호치민 시티에서는 더욱. 모터사이클의 가격은 한국돈으로 100여 만원 정도라고 한다. 거기다 100%로 특별소비세과 부과되어 정말 비싼 물건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타고 다닌다.



모터사이클이 가득한 거리는 한 마디로 정신을 차리기 힘들다. 그곳에서는 차로 운전하는 것이 더 힘들 지경이다. 더군다나 한국과 다르게 모터사이클이던, 사람이던 꼭 파란 신호에 건너지 않는다. 서로서로 흐름에 무리가 없으면 그것이 어떤 색의 신호라도 상관없다.

베트남에서 길을 건널때 지켜야 할 것은 절대로 뒷걸음치면 안된다는 것이다. 만일의 경우 가던 걸음을 멈추더라도 뒷걸음치면 안된다. 모터사이클 운전자는 작은 틈을 보고 들어오고 대개의 경우 사람은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뒷걸음치면 충돌할 우려가 있다. 번잡한 거리를 가시는 분은 참고하시길.




마침 베트남을 찾은때가 설 연휴였다. 베트남에서는 설 연휴를 떼라고 한다. 붉은 현수막은 당과 정부가 거리에 내건 새해 인사라고 한다. 가끔 읽어보면 재미있는 것들이 있다. 소리 나는 대로 읽다보면 우리말 중 한자말과 비슷한 음, 의미가 있다.



사랑스런 열대과일들. 가운데 핑크색은 드래곤플룻이라고 하던가. 베트남에선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동남아시아를 여행해본 사람은 한번쯤 봤을지도 모르겠다. 맛은 키위같고 속 생김도 그렇다. 속 색깔이 하얗다는 것만 다를뿐. 키위보다 달고 덜 자극적이어서 좋다.



거리를 걷다 발견한 PC방. 아이들이 오락에 열심이었다. 외국인인 내가 사진을 찍는 줄도 모르고.



하노이 노점에서 먹은 껌. 껌은 볶음밥이다. 베트남에서 처음 먹은 밥이다. 이 밥을 나는 절반도 먹지 못했다. 절반이 뭐야 사실 몇 젓가락 먹고 말았다. 돼지기름으로 볶은 밥에 비위가 상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여행을 통해서 나도 놀랐다. 나는 첫 여행인 유럽여행에서 가리는 것 없이 모두 잘 먹어 가리는 음식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던 것이다. 돌아보니 유럽에서 먹었던 것은 빵, 파스타, 커피 이런 것들이라 가릴 것이 없었다.

그래도 베트남에서는 음식을 먹을때 끊임없이 시도했다. 끊임없이 시도하고, 실패하고, 시도하고, 실패하고. 그래서 늘 배가 고팠고, 그래서 늘 맥주를 마셨다. 나중엔 지역마다 다른 맥주를 마시는데 재미를 붙여 아침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식사에 술을 곁들였다.




베트남 사람들은 대부분 아침을 외식을 한다. 베트남에 도착한 다음날 우리도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에 갔다. 거리에 먹을 것을 파는 노점상이 많지만 우리는 어느 식당을 골라 들어갔다. 일행이 많기도 하였지만 거리에서 도저히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퍼pho. 베트남에서 먹는 첫 쌀국수여서 반가웠지만 나는 이 쌀국수도 얼마 먹지 못했다. 향차이라고 하는, 한국에서는 고수라고 하는 풀 때문에. 그때 처음으로 나는 향차이를 맛보았다, 너무 힘들었다. 향차이를 특히 좋아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문전에 향차이를 빼달라고 하는 게 좋다. 어떻게 말하냐고? 그냥 "no 향차이"라고 하면된다. 그게 안통할 상황이면 아무리 유창한 영어를 해도 안통하니 그냥 건져내고 먹는 수 밖에.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쌀국수는 지역마다 다르다. 국물을 우려내는 방법은 물론 면이 다르다. 어떤 것은 소면처럼 가느다란 면인가 하면 우동보다는 얇지만 굵은 면도 있고, 칼국수처럼 납작한 면도 있다. 또 볶음 국수도 있고, 비빔 국수도 있다.
쑤언의 말에 의하면 한국의 베트남 음식점에서 내놓는 쌀국수는 모두 태국산이라고 한다.






씨클로. 내가 카메라를 들이댈때마다 1$를 불러 나를 슬프게 했지만 타지 않을 것이라 이야기하고, 사진을 찍어도 어느 누구하나 화를 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웃을뿐.



횡단보도의 보행정지 신호. 신기해서 찍었다.



하노이에 있는 동안 구시가에 있는 미니호텔에 묵었다. 그 호텔 근처에 사다리를 만드는 곳이 있었다. 이색적인 풍경이라 그냥 찍었는데, 알고 보니 꽤 유명한 곳이었다.



떼의 풍습. 지전과 몇 가지를 태운다. 이런 풍습은 중국과 비슷한 것 같았다.
베트남 사람들은 베트남이 중국문화권이라고 하면 매우 싫어한다. 국경분쟁에 오래 시달린 이유도 있으며, 자기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월의 남쪽이라는 베트남, 월남이라는 말도 쓰면 안된다는 말을 어디선가 본것도 같다. 그래서veitnam이 아니라 viet이라고 해야한다는 말을.




노점에서 먹은 하노이 비어. 하노이 비어는 병맥주와 생맥주가 있다. 꼭 생맥주를 맛보아야 한다는 쑤언의 권유에 따라 생맥주를 시켰다. 정말 환상적인 맛이었다. 하루종일 마신 매연, 모터사이클이 많다보니,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춘권. 한국에서 먹는 춘권과 다르다. 한국에서 먹는 춘권은 고기를 만두피로 싸 튀긴 것인데, 이것도 비슷은 하다. 그런데 만두피가 다르다. 만두피가 페스트리 반죽같다. 언뜻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하여간 그렇다. 그래서 한국의 춘권처럼 딱딱하지도 않고 맛이 좋다. 이 맛을 잊지 못해 한국에 돌아와 춘권을 시키고 너무너무 실망했다. 그냥 두꺼운 만두피였던 것이다.



하노이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 아쉬워 노점에서의 저녁식사 뒤 미니호텔 근처의 바를 찾아들어갔다. 하노이 비어 생맥주와 비교하기 위해 병맥주를 시켰다. 역시 쑤언의 권유가 탁월했다. 생맥주만큼 시원함이 없었다. 그래도 맛있었다, 한국에서 비슷한 맛을 찾자면 카스?



나만 술을 먹고 다른 사람들은 커피와 파파야를 먹었다. 파파야를 먹은 사람들의 표정은 참 뭐 씹은 표정이었다. 너무 익숙하지 않은 맛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파파야는 제 맛을 찾아 먹기가 참 쉽지 않다고 한다. 약간만 덜익어도 딱딱하여 맛이 없고, 약간만 더익어도 상한다고. 나도 몇 번의 시도 끝에 제대로 익은 파파야를 맛볼 수 있었고, 그래서 좋아하게 됐다. 그 맛을.



하노이를 떠나던 날 아쉬운 마음에 일찍 일어나 미니호텔 주변을 산책했다. 자전거 뒷좌석 가득 실은 야채들만큼 신선한 아침공기, 그리고 사람들이 잊혀지지 않는다.

+ 베트남 분단 시기 북베트남의 서울이었던 하노이가 오늘날 베트남의 서울이다.  북베트남이 전쟁에서 이겼으므로 당연한 것도 같다.  하지만 하노이는 정치와 행정의 서울이고, 경제의 서울이 호치민 시티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호치민 시티는 우리에게 사이공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곳이다.  사이공은 남베트남의 서울이었고 통일되면서 다소 정치적인 이유로 사이공이라는 이름에서 호치민으로 이름으로 바꾸게 됐다.  호치민 주석과 구분하기 위해 각종 가이드북에는 호치민을 호치민 시티라고 쓴다.  사이공이라고 불러도 베트남 사람들이 싫어하는 표정을 짓거나 하는 일은 없으나 가급적이면 호치민이라고 불러주는게 좋다.  누군가 서울을 경성이라고 불러봐라, 기분이 좀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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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닥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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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여행은 참 특이했다. 그야말로 별 생각없이 따라 나선 여행이었다. 언니가 가는 여행팀에서 한 사람이 빠지게 되어 예약한 비행기 표가 남은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갈까'하고 생각하다 덜컥 떠나게 된 여행이었다.

여행준비도 그랬다. 베트남을 알고가자는 마음으로 몇 권의 책들을 읽었다. ≪사이공의 흰 옷≫, ≪무기의 그늘≫, ≪하노이에 별이 뜨다≫를 읽었다. 이상한 것은 여행을 준비하며 본 책 중에 가이드북은 없었다는 거. 여행에 가서도 가이드북이 없어 방현석의 책을 꺼내 필요한 구절을 찾아가는 식이었다. 그런 여행준비가 관광이 아닌 여행으로 만들어주었던 것 같다.

전날까지도 언어교육원에서 일로 정신없이 보내다 정신없이 하노이로 날아갔다. 베트남의 서울 하노이는 생각보다 멀었다. 인천에서 5시간쯤 비행기를 타고 갔으니까. 그래도 여행은 언제나 즐거운 법. 읽었던 방현석의 책을 다시 뒤적이며 하노이로 날아갔다.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다. 공항에 들어서면 다소 엄격한 분위기의 입국장이 나온다. 이용객도 많지 않고 공항이 가지는 분주함은 찾아볼 수가 없다. 아, 내가 베트남에 왔구나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고 공항을 나섰다.

그야말로 쏟아지는 햇빛이 아침까지 입고 있다 인천공항에 남기고 온 겨울 코트가 아주 먼 옛날이야기처럼 기억하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계절은 넘나드는 여행은 처음이라 당황스럽기도 했다. 돌아올때는 시간에 쫓겨 반바지를 입고 2월 인천에 도착했다. 본의 아니게 항공사 담요를 치마삼아 칭칭 두르고 출국장을 빠져나올 수 밖에 없었다는.




넓다란 공항도로를 달려 민속박물관으로 갔다. 민속박물관은 베트남의 주택구조, 농기구 그런것들을 보여주었는데 그걸 보면서도 내가 간 곳이 베트남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약간 서늘한 기운의 민속박물관 본관을 나와 뒷마당에 가고서야 내가 간 곳이 베트남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뒷마당엔 관광객, 공안, 민속의상을 입은 안내원등이 어울려 민속음악에 맞추어 민속놀이가 한참이었다. 한 번쯤 TV에서 보았을 수도 있는민속놀이. 박자에 따라 긴 대를 넓혔다, 좁혔다 하는 놀이고 사람들은 그 사이를 뛰어다닌다. 박자를 모르면 발목이 긴 대에 끼고 말고, 그런 상황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준다. 나의 일행도 몇 명 도전을 하였으나 실패.




호치민 주석이 어린이를 위해 만들었다는 극장에서 본 수상인형극. 발 뒤에 사람들이 긴 막대로 인형을 조작한다. 그런데 생각보다 역동적이어서 재미있게 보았다. 지금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심청전과 장화홍련전과 같은 내용이었던 듯.

사진을 찍으려면 추가요금을 내야한다. 그 사실을 모르고 몇 장을 찍었다.




사실 나는 인형극보다 옆에서 연주하는 전통악기와 그 소리에 확 꽂혀버렸었다. 돌아와서도 그 소리를 잊지 못하고 기억했다 인터넷을 찾아헤맸다. 저 악기의 이름은 단 바우Dan Bau다. 소리가 사람을 어딘가로 끌고 가는 느낌이다. 꼭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소리같지만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낸다.
http://www.tienghatquehuong.com/instruments/DanBau.htm




화장실 변기다. 뭘 이런걸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모든 것이 신기했다. 처음에 어디가 앞인가 뒤인가를 몰라 약간 당황했다. 한국으로치면 물 흘러들어가는 홀이 있는 곳이 앞이지만, 그곳에서는 홀 있는 곳이 뒤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것이 더 합리적인 것도 같다. 밀어내는데(?) 많은 물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혹시, 한국처럼 거기가 앞인 건 아닐까. 컥.




청와대에 비하면 소박하지 않은가. 베트남 주요 관공서 빛깔이 모두 저랬다. 왜 모든 관공서는 노란색일까. 노란색이 길(吉)함의 상징일 것이라는 추측만. 베트남에선 노란 금귤나무가 복을 상징하여 가정이나 건물의 입구에 많이들 기른다. 들어가본 곳도 아니고, 베트남의 대통령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정도였으니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그냥 줄지은 베트남 관광객이 인상적이었고, 그들을 보면서 북한을 떠올렸다면 내가 이상한가.



처음으로 발견한 아오자이 차림의 처이. 우리가 보기엔 다 같은 아오자이인데 모양이나 빛깔을 통해 지역과 출신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아오자이에 대한 판타지는 윗자락 옆트임으로 살짝살짝 보이는 허리선이다. 정말 그게 허리를 드러낸 것보다 더 '야릇'하다는. 이런말 하는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지는 말아줘.(-_- );;




주석궁에도 사람이 많다. 주석궁은 호치민 주석의 생가를 복원해놓은 것과 실제 거주했던 뒷채가 있다. 뒷채는 베트남식 가옥이라고 한다. 관공서 같은 건물을 두고 베트남식 가옥에서 생활한 것을 두고도 그의 소박함을 칭송하기도 한다.



정원안에 금귤나무. 나도 기르고 싶다, 금귤나무.





사람들이 몰려 구경하는 것은 아래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나무뿌리다. 나무뿌리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아래로 아래로 뻗기 마련인데 위로 뻗으니 신기하기도 하겠지.



기이한 나무뿌리는 호치민 주석에 대한 신화로 풀이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분위기에 씁쓸해하며 찾은 곳이 호치민 주석의 묘였다.



호치민 주석의 묘는 입장에서부터 까다롭다. 심지어 공항보다도 더 엄격하다. 입구에서 인원을 통제하고, 들어가서도 안내에 따라 줄지어 다녀야한다. 옷에 대한 규제는 없었던 것 같은데 모자는 금했던 것 같다. 카메라도 안된다. 그래서 보관함에 카메라 등을 맡기며 찍은 이 사진이 전부다.

관람객은 외국인보다 전국 각지에서 온 베트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호치민 주석은 창백한 얼굴을 하고 누워있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예를 표한다. 예를 표하는 방식은 간단한 묵념이었던듯. 하기 싫은 사람은 안해도 된다, 단 대화와 같은 작은 소란도 금지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체제가 호치민 주석을 버팀목 삼는다는. 탁 깨놓고 이야기하면 이용한다는. 이런저런 책들에서 읽으면 아직도 호치민 주석은 베트남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의 삶 자체가 베트남과 같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로부터 당은 이미 외면당한지 오래다. 외면, 그 전단계는 불신이었다. 반프랑스, 반미국 전쟁을 겪은 전쟁세대가 당과 정부의 주요한 요직에 있었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부패로 정치인생을 마감하는 모습들을 가지면서 베트남 인민들이 당과 정부를 불신하게 된 것 같다. 묘를 만들지 말라는 호치민 주석의 유언을 엎고 당과 정부가 만든 묘에 누워있는 호치민 주석. 너무 추워보였다. 호치민 주석의 묘가 있는 회색 바딘 광장이 그런 느낌을 더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호치민 박물관. 그야말로 볼거리 가득이다. 베트남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곳이다. 전시 수준도 최상급이다. 박물관 어딘가에 호치민 주석이 보았다는 정약용의 목민심서도 있다는데, 그건 찾아보지 못했다.
같이 간 한 선생님이 당신은 호치민 주석도 좋고, 박물관도 다 좋은데 딱 싫은게 한 가지 있단다. 그것이 무엇이었냐면, 호치민 박물관을 설계한 사람이 레닌 박물관을 설계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것이 연대라기 보다 큰 사회주의국가(지어질때는 소련이이었으니까)에 대한 일종의 사대처럼 보이는 것이 싫으시단다. 옳으신 말씀.




호치민 박물관 전시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파시즘에 저항한 스페인을 전시한 곳이었다. 스페인의 파시즘 저항에 대해 일종의 연대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베트남에서 스페인을 마주할 줄이야. 얼마전 다시 본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을 지금처럼만 이해하고 있었더라면 지금도 뭐라고 불어야 좋을지 모르는('스페인내전'이라고 부르기 싫다) 스페인의 파시즘 저항사를 영어로 읽어내느라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전시는 앞서 말한대로 수준급이었다. 작품으로 형상화 한 것은 베트남의 역사, 호치민 주석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상징을 누구는 '찬양'이라는 말로 가둘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보고 싶지는 않다.



억압을 뚫고?



각각의 작품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등장하는 것은 벼였다. 베트남 주식의 기본이며, (농경)문화의 기본인 벼. 그뿐만이 아니라 중요한 계급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는 것 같았다.



호치민 박물관의 화장실이다. 이 화장실은 남자 화장실이 아니다. 분명 여자 화장실이다.
화장실에 들어서는 순간 문화적 충격을 감당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볼일을 보는 이는 없었지만 당황스럽기 이를데 없는 열린 구조였다.




적은 량의 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물론 칸칸이 문이 달린 화장실도 있으니 베트남 여행을 너무 두려워만 마시라.



꼭 호치민 박물관을 레닌 박물관을 만든 사람이 만들어야 하냐고 문제를 제기한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호치민 주석이 너무 일찍 죽었다는. 또 옳으신 말씀.
하지만 그런 생각도 든다. 가장 빛날 때, 사람들이 가장 기억하면 좋을 모습만을 가지고 그가 떠나갔기에 그에 대한 존경심이 오늘까지 이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호치민 박물관을 나와 찾아간 곳은 군사 박물관, 전쟁 박물관이다. 베트남의 현대사에서 전쟁을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가 없지만 그래도 이런 류의 박물관이 반가울 수만은 없다.
이 전시관은 디엔비엔푸 전투 기념관이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베트남 현대사에서 기록할만한 전투다. 70여 년을 이어온 프랑스 강점기가 사실상 이 전투를 고비로 마침표를 찍었다. 물론 곧 이어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됐지만.




한국의 일제 강점기를 대략 39년이라고들 본다. 베트남은 그 두배에 가까운 시간을 프랑스의 지배아래 있었다. 한국은 온전히 제 손으로 강점기를 끝냈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베트남은 길고 긴 저항을 통해 프랑스 강점기를 끝냈다. 그 배경에는 앞서 말한 농경 민족 특유의 부지런함과 끈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소녀 베트민들.
베트남에서 무기를 들었다고 다 베트콩이 아니다. 프랑스와 일본의 파시즘에 저항하던 시절 민족해방전선과 정당을 베트민이라하고, 분단후 남베트남에서 북베트남을 지원한 민족해방전선을 베트콩이라고 한다.




70여 년 강점기를 저항으로 끝낸, 그렇게 강인한 사람들도 미국의 무차별 폭격엔 달리 손 쓸 수 있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폭격으로 베트남을 원시시대로 돌려놓겠다는 오만하기 이를데 없는 어느 미군의 말을 읽고 흥분했던 기억이 난다. 그 기록들을 고스란히 남겨둔 곳이 바로 이 박물관이다. 박물관의 조용한 분위기는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무언의 다짐처럼 느껴진다.



베트남 사람들은 하나 같이 그렇게 말을 한다. 이제 베트남은 과거를 닫고 미래로 간다고. 정부 관료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는 쑤언의 부모님도 그렇게 이야기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그들의 응답은 체제가 교육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그들의 응답에서 그들이 과거를 닫았는지는 몰라도 절대로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베트남 현대사가 치러낸 전쟁들은 베트남에게는 잊을 수 없고, 치유할 수 없는 큰 상처이면서 동시에 큰 자랑이다. 우리와 비슷한 현대사를 가지고 있는 베트남이기에 더욱 내게는 강하게 다가왔다. 나는 베트남에서 과거의 우리 현대사와 오늘의 북한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래서 베트남 여행은 여행이지만 아주 큰 과제를 부여받은 그런 여행이었다.

+ 아주아주 단단히 마음을 먹고 베트남 여행기 정리를 시작했다.  베트남에 대한 길고 긴 이야기들을 적고 쓰기 버튼을 누르는 순간 모든 것이 날라갔다.  내 계정 HDD용량이 가득차 더 이상의 업로드를 거부한 것이다.  그래서 HDD용량을 늘이는 서비스를 신청하고, 글을 다시 썼다.  그런데 처음만 못하다.  어떤 이야기를 썼는지 기억도 안나고.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같은 일을 반복하자니 4년 만에 베트남 여행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생겨났던 벅참이 사라졌다.  아쉽지만 이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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