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춘(2006). ≪어느 저널리스트의 죽음≫. 후마니타스.

부제는 '한국 공론장의 위기와 전망'이다.  사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위기인 것은 확실히 알겠는데, 이미 오래전부터, 전망이 있는가는 모르겠다.

여전한 주류 미디어의 작태, 변함이 없다.  그 작태는 기형적인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안감힘과 정치권력마저도 좌지우지하는 경제 기득권에서 비롯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너무너무 신기했다.  어떻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나랑 같은게, 한 가지라도 의견을 같이하는게 하나도 없을까.  신기할따름.  
황우석이 유전자, 배아 어쩌고 그럴때 생명윤리 운운하며 그러한 실험에 제동을 걸었던 부시의 발언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니, 부시랑 나랑 같은 의견이라는 말이야?'하고.  물론 부시의 발언은 생명공학의 주도권에서 비롯되 나온 말이겠지만.

그런데, 이런 책 이제 재미없다.  그래서 대안이 뭔가하는거지.  그게 더 궁금할 따름이다.  재벌로의 독립, 선거공간에서 언론의 제기능 등 책의 후반부라고 제시한 것들은 대안이라기보다 여전히 풀어야할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솔직히, 손석춘에 대한 이런 시큰둥한 반응은 지난 연말 센터에서 있었던 강연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그때 손석춘의 말을 들으며 그건 아닌데 하고 생각을 했다.  그의 발언의 요지는 한국사회에서는 '분배'도 중요하지만 '성장'을 논외로 놓고 갈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맥락적으로 이해는 가지만, 그런 한 마디의 말이 어떻게 악용될 수 있는가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 아닌가.  또 그런 사례들을 글로 써왔다.  그런데 그런 그의 말은 무척이나 위험한 말이고,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 이후 열렬한 지지는 시큰둥한 지지로 바뀌고 말았다.

책에서 재미난 부분은 전문으로 실린 신문윤리실천요강이었다.  그야말로 그것만을 실천했어도, 이 나라가 이모양은 안됐다.  나도 처음으로 꼼꼼히 읽어봤는데, 정말 한 학기 세미나 감이다.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시기를, 특히 저널리스트를 꿈꾸는 사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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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춘(2005). ≪마흔 아홉 통의 편지≫. 들녘.

손석춘의 새 책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 어서어서 사들였다.
≪한국 공론장의 구조 변동≫.
지난 가을 하버마스를 공부하고 있다는 그의 말이 있었기에 의심하지 않았다.
책을 받아들고 있는 나를 언니가 보고
"편지 뭐라카든데.."
'엉?'
다시 찾아보니 소설이 나와있었다.
다시 구입.  며칠을 기다려 받았다.  그러나 당장은 읽을 분위기가 아니라 며칠을 더 기다려 읽은 책.

가장 먼저 다가오는 물음은 복잡한 물음이 아니라
어디까지가 진짜일까, 아니 진짜일까 아닐까이다.
궁금궁금..
진짜면 그의 아버지가 산사람?(' ' )a

지난 가을 같은 물음을 그에게 물었다.
장사 밑천이라 밝힐 수 없다나 뭐래나.
'그럼 픽션이겠지?'하고 마음을 다잡지만
"≪마흔 아홉 통의 편지≫를 삼가 아버님 영전에, 그리고 아버님과 같은 시대를 살아간 모든 분들께 바친다."는 에필로그의 마지막 말은 픽션으로 애써 정리한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이 책을 처음 펼치고 '뜨아!'하고 놀랐다.
'≪아름다운 집≫, ≪유령의 사랑≫, 그리고 ≪마흔 아홉 통의 편지≫가 연작이야?'
앞선 두 권의 책에서 그런 말이 없었는데 말이다.  있었나?
새 책을 읽으며 보니 세 권에 책을 나란히 관통하는 인물 한민주가 나오긴한다.
앞선 두 권에선 이야기에 몰입하느라 그를 새기지도 못했는데
어느 드라마의 제목처럼 '돌아보니 그가 있었다'.
한민주, 그는 손석춘의 분신?  또 픽션이냐 논픽션이냐 물음이 모락모락. 끙!(-_- ):

이 책을 읽다보면 웃긴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면, 책 속의 한민주는 한 신문사의 논설위원으로 있다 퇴직한 사람이다.  소설 책도 두 권 써냈고, 소설 속에서 말이다.  그리고 청년학교도 하고 있다.
자기 이야기잖아? 뭐야뭐야.(-_- ):
소설의 내용 속에 실비아가 묻는다.  이전 소설 속의 인물 이진선은 진짜인지.  그리고 한은 답하고.
한은 청년학교를 여는 이유에 대해서도, 그가 걸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뭐야뭐야.(-_- ):
마르크스와 나눈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토로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손, 의외로 단순한 사람일 것도 같고.
그 소설을 그렇게 밖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가 단순한 건가?

그는 저널리스트로, 소설가로, 그리고 학자로도 욕심이 있어보였다.
저널리스트로서 그에 대해서 의구심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싫어할 사람은 많을 수도 있겠다.  의견이 같고 다르고를 떠나 그는 저널리스트로서는 자리를 굳혔었다는 말이다.)
소설가로서는?
학자로서는?
잘모르겠다.  판단유보.
내가 인색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기대가 높기 때문에 그러한 것으로 이해해주길.
확실한 것은(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는 미움 받는 학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가 하는 작업은 의미 있는 작업들일 것이다.
(문제는 그가 아니라 그를 미워할지 모르는 학자 그룹이다.)

소설 세 권, 그가 꼭 한번 다루어 보고 싶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아마 그가 생각보다 더 치밀한 인간이라면 이후로 세 권쯤의 내용도 이미 마련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준비되어 있을 것 같다.ㅋㅋ)
앞으로의 작업, 그것이 저널이던 소설이던 학문이던,이 기대된다.
EBS에 그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엔 '시사평론가'로 직함이 붙어 있다.ㅋㅋ

≪마흔 아홉 통의 편지≫?
당연히 읽을만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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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있을 손석춘 기자 강연과 관련하여 부산민언련의 사무차장님과 이야기 나누다
생각보다 '지나치게 유(柔)한' 그의 일면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바로 얼마전 mbc 100분토론에서 패널로 나왔을 때 일을 함께 이야기했다.
그날의 상황에 대해서 손석춘 기자 스스로 쓴 글이 있어 옮겼다.

이 프로그램을 나도 보았다.
방청객으로 나온 젊은이의 발언이 나를 흥분하게 만들어 기억에 오래 남기도 했지만,
그런 경우 나는 "저것이 아주 돌았구나(-_- );"라는 감상을 내뱉는다,
그 젊은이를 바라보던 손석춘 기자의 안타까운 눈빛과 표정 때문에도 오래 남았다.

젊은 벗과의 짧은 '국보법 대화'

당신께 편지로 띄우는 다음 글은 월간<작은책>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젊은 벗들을 바라보는 저의 착잡한 심경을 담았습니다.

국가보안법 논란이 쉼 없이 불거지고 있다. 국보법이 없으면 나라가 곧 결딴이라도 날 듯이 부르댄다. 대형 기독교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한 '구국기도회'까지 열렸다.
비단 '대형 교회'만이 아니다. '대형 언론' 또한 비금비금하다. <조선일보>는 '국보법 논쟁'에 '무관심한 대학가'라는 기사까지 내보냈다. "국보법 폐지 문제로 교문 밖에선 보수·진보가 짝 갈려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요즘 서울의 대학가 교문 안쪽은 조용"하단다. 기사는 이어 "1980년대 초 국보법 폐지를 우리 사회에서 처음 큰 목소리로 제기했던 곳이 대학이란 점을 생각하면, 뜻밖의 풍경"이라고 진단했다. 심지어 국보법 문제를 거론하면 "눈총을 받는다"는 한 대학생의 발언도 소개했다.
실제로 젊은이들 가운데 국보법을 사수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고 싶다. 대학가에 강연을 많이 다녔지만, 내놓고 국보법 사수를 주장하는 젊은이를 필자는 최근에서야 처음 만났다. 그것도 국보법을 주제로 한 <문화방송>의 '100분토론' 생방송(9월16일) 자리에서였다. 방청객으로 참여한 '자유시민연대의 회원'이라고 밝힌 한 '청년'은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국가보안법은 국가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적 행위를 처벌하는 법입니다. 그 법이 나쁜 법입니까?"
이어 "97년 이후에 국가보안법으로 인권, 정말 인권적인 피해를 받은 사례가 있는지 밝혀달라"고 주문했다. 필자는 젊은 벗의 질문에 구체적 피해사례를 거론하여 답했다.
"남북공동선언을 이끌었던 김대중 정권 시절의 문제다.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마르크스의 사상을 번역해서 출판했다는 이유로 출판사 대표가 구속되었다. 실형을 선고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났는데도 다시 구속했다. 2003년 스트라이커 부대에 항의한 한총련학생들이 구속되었다. 그 구속되는 학우들을 가로막은 학생들도 연행했다. 잡아간 뒤 마땅한 근거가 없자 이적표현물 소지 혐의로 구속했다. 한총련 자료집을 지니고 있었다는 이유이다."

절망을 느낀 것은 그 다음이었다. 젊은 벗은 필자의 답이 끝나자마자 "한총련은 이적단체"라고 주장했다. "자료집을 지닌다는 것만으로 지금 질문한 젊은이의 동료가 구속되는 게 국가안위의 문제인가"라는 필자의 반론에 그가 한 말은 아직도 생생하다.

"저는 한총련 근처에도 안 갔어요. (함께 나온 회원들인 듯 손으로 가리키며) 여기 있는 사람들은 상당히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단 한번도 국가보안법 그런 것에 신경을 안 썼습니다."
자유시민연대. 2000년 11월에 출범한 뒤 '나라 지키기 운동, 기업하기 좋은 나라 운동, 교육 살리기 운동, 밝고 힘찬 사회 운동'의 4대 운동을 벌여왔다. 딴은 좋은 말들이다. 그런데 안을 들여다보면 절로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가령 나라 지키기 운동으로 국보법 폐지 반대에 이어 '금강산관광 반대'까지 주장한다. '교육 살리기' 또한 전교조 선생님들에 대한 날 선 공격이다. 따라서 자유시민연대의 청년회원이 "국보법에 신경도 안 썼다"는 말을 마치 자랑이라도 되는 듯 말하는 게 새삼스런 일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겸임교수로 대학강단에 도 출강하는 필자에게 청년의 말은 충격이었다. 동시에 안쓰러웠다. 그래서였다. 절로 탄식이 나왔다.
"젊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지요?"

생방송에서 밝혔듯이 문제의 핵심은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에 대한 찬반에 있지 않다. 대학생들이 민주적으로 선출한 학생회 간부들을 곧장 수배하고 감옥에 가두어온 야만의 현실을, 자료집을 지녔다는 이유로 서슴없이 구속하는 현실을 바라보면서도 국보법은 "국가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적 행위를 처벌하는 법"이라며 "나쁜 법입니까?" 되묻는 젊은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방송이 나간 다음날이다. 필자의 전자 편지함에 몇몇 분들이 우려를 보내왔다. 그 가운데 한 분의 글은 '무서움'을 토로했다.
"연세 드신 분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새파란 젊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더 무섭게 생각되더군요. 사고의 범위뿐만 아니라 그 어린 나이에 그렇게 확고하게, 논리적 바탕 없이 맹신하는 자신감이 무섭더군요. 다양성을 인정하고 싶지만 그 다양성도 논리적 기반을 가져야 하는데 뿌리깊은 유신향수가 느껴졌습니다. 우리 사회의 시스템 때문일까요?"

그랬다. 필자가 서글펐던 가장 큰 이유는 공안부장 출신의 50대 중반의원과 20대 중반의 청년이 거의 같은 시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토론자로 나선 서울지검 공안부장 출신인 장윤석 의원(한나라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헌법을 고치고 형법을 개정하면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는 필자의 토론에 느닷없이 물었다.
"북한을 믿습니까?"
필자는 '공안검사' 다운 그의 기습적 질문의도를 알았지만, 작심하고 답했다.
"네, 믿습니다."

무릇 상대에 대한 믿음 없이 어떻게 대화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그 자리는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는 국보법을 주제로 한 토론 마당이었다. 생방송 토론이 끝나자 그 젊은이 옆에서 방청하던 30대가 다가왔다. 분노를 도저히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그는 "역사공부 다시 하라"고 소리 질렀다.

다음날에는 예상대로 온갖 욕설과 협박의 전화가 줄을 이었다. "북에서 온 간첩 아니냐"는 질문을 진지하게 물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국보법은 민주주의의 기본인 사상의 자유를 부정하는 악법 아닌가, 하여, 마땅히 국보법의 폐지는 진보주의자가 아니라 보수주의자들이 나서야 할 과제 아닌가. 적화통일 위협을 내세우지만 오늘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있지 않고 미국에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도대체 왜 그럴까. 왜 우리 사회의 이념적 지형이나 토론의 수준은 저열한가. 모든 것을 언론의 책임으로 돌릴 뜻은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한국언론이 그런 선동에 앞장서온 게 사실인 것을. 심지어 내란을 선동하는 글까지 버젓이 신문에 싣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내란을 선동하고 마구 좌우갈등을 부추기는 자들에게 일부 젊은이들까지 휩쓸린다는 데 있다. 물론, 모든 젊은이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대학학생회 연합인 한총련은 국보법 폐지에 적극 나서고 있다. 비단 한총련이나 대학생만도 아니다. 숱한 청소년들이 2002년 미군 장갑차에 깔려 참혹하게 숨진 두 여중생을 추모하기 위해 촛불을 들고 찬 거리로 나왔다. 중고생은 물론이고 초등학생들까지 촛불을 밝히며 검고 맑은 눈을 불태웠다.
그래서다. 벗들에 대한 비관은 현실과 다를뿐더러 옳지 못하다. 하지만 필자는 여전히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맞은 편 방청석에 앉아있던 젊은 벗들이 모두 질문자와 같은 생각이라 게 쉬 믿어지지 않는다. 순진한 탓일까. 그것은 아니라고, 질문한 젊은이를 포함한 그들 대다수는 곧 생각이 바뀔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이 진실을 못 볼만큼 기득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직 아니기 때문이다.
(인터넷 한겨레 2004/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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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공화국의 밤


밤이다.  캄캄해서일까.  윤똑똑이들이 곰비임비 무대에 오른다.  사뭇 근엄한 목소리다.  "이성을 찾자."  살천스레 덧붙인다.  "정치적으로 이용 말라."
누구를 이름인가.  고 김선일.  가난 탓에 이라크로 떠나 참혹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살고싶다"는 고인의 절규는, 아니 비명은 2004년을 살아가는 모든 한국인의 귓바퀴에 '문신'으로 새겨졌다.  그래서다.  부아를 가라앉히고 냉철하게 짚어보자.

김선일은 왜 죽었는가.  칼을 들이댄 자는 이라크 무장세력이다. 허릅숭이들이 '응징'을 주장하는 근거다.  실소로 넘길 일만은 아니다.  철부지의 선동을 방관할 만큼 오늘 한국인은 안전하지 않다.  사실 앞에 겸손하자.  미국 조지 부시 정권의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노무현 정권이 놀아나지 않았다면, 이 모든 참극은 그저 악몽일 수 있다.  대한민국 30대가 참수당할 까닭이 무엇인가.  시한을 제시하고 파병을 철회하라는 저들의 결연한 최후통첩을 노 정권이 정면으로 곧장 거부하지만 않았더라도 구명 협상은 가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보라.  저 윤똑똑이들을.  테러에 굴복할 수 없다며 짐짓 '용기'와 '고뇌'를 내세운다.  누구인가.  피로 홍건한 무대에 뒤뚱뒤뚱 오른 저들은.  조지 부시 그리고 노 대통령이다.  그 뒤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부닐고, 어김없이 부자신문은 추썩거린다. 여기서 부시를 거론할 뜻은 없다.  부시가 '악의 축'을 거론한 2002년 2월, 이미 그에게 '악의 제국'이란 말을 돌려주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부시의 침략전쟁에 용춤추는 노무현의 책임이 자칫 흐려질 수 있어서다.  김선일의 주검이 발견된 뒤, 그는 부시가 공개적으로 밝힌 '믿음'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노 대통령만이 아니다.  입만 벙긋하면 '개혁'을 외치는 열린우리당의 신기남 의장도 부르댔다.  "테러리스트 협박에 굴종하여 파병을 철회할 수는 결단코 없다."  참으로 별쭝맞지 않은가.  대체 누가 '협박에 굴종'하여 파병 철회를 요구했는가.  이라크 무장단체를 '유괴범' 따위로 비유하는 신기남의 신기한 사고에서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는가.  한나라당은 또 어떤가.  추가파병안을 통과시킨 16대 국회의 1당은 누구였던가.  고인의 영전에 언죽번죽 조문하는 박근혜의 모습에서 위선을 읽는 것은 과연 과민반응일까.

더하여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까지 굳이 고발해야 할까.  아니다.  다만 저들의 목 쉰 노래에 노 정권이 더불어 '합창'하는 현실만 직시하자.  그렇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눈과 귀를 열 때가 되었다.  똑똑히 보라.  저 야합의 몰골을.  환청이 아니다.  저 저주의 합창은.  실제상황이다.  더 늦기 전에 참된 사랑을 실천할 때다.

그렇다.  문제는 누가 정부를, 아니 공화국을 바로세울 것인가에 있다.  결코 절망할 일이 아니다.  보라.  민중이, 노동자가 일어서고 있지 않은가.  비단 전국 곳곳에서 타오르는 촛불만이 아니다.  정규직·비정규직·예비 노동자들 가슴마다 뜨거운 눈물이, 차가운 촛불이 번져가고 있다. 이미 민간항공 조종사 노조로 구성된 항공연대가 '파병 수송기' 조종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전국운송하역노조도 학살전쟁을 위한 수송에 단호히 고개 저었다.  금속산업연맹도 오늘 총파업 투쟁을 벌이며 '파병철회'를 결의할 예정이다.

그렇다.  한국의 노동자가 지며리 깨어나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국회의원 10명과 민주노총·한국노총이 조직적으로 연대하고, 그 물결이 저 촛불을 든 벗들과 만나야 한다.  촛불과 바다를 이룰 때, 그 때 비로소 노 정권은 파병을 철회할 수 있다.  그 때 비로소 더 큰 참극을 막을 수 있다.  그 때 비로소 이 땅에 평화를 지킬 수 있다.

그래서다.  30대 청년 노동자 김선일, 그를 우리 가슴에 묻자.  고인을 죽인 저들은 노상 노동자를 탄압한 바로 그들 아닌가.  자신의 이익을 '국익'으로 호도하는 저들의 언구럭에 더는 기만당하지 말자.  민중의 힘, 노동자의 힘으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 갈 때다.  이 땅의 주인은 다름아닌 우리 아닌가.  벅벅이 불을 밝히자.  여울여울, 공화국의 밤을.  손석춘 논설위원 songil@hani.co.kr
(인터넷한겨레 2004/06/28)


윤―똑똑이[명사] '지나치게 영리한 체하는 사람'을 농조로 이르는 말.  

문제는 그것이다.  '지나치게 영리한 하는'.
미국이 그려준 시뮬레이션에 겁먹은 盧와 정부.
분명한 것은 이 '전쟁'을 용인하면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전쟁도 용인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을 근거로 나만 예외라는, 나만 예외일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가.

무지는 죄다.
무지를 멈춰라.

反戰反盧!


한겨레 칼럼읽기
- '공화국의 밤'
  http://www.hani.co.kr/section-001006000/2004/06/00100600020040628154025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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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손석춘 기자의 글을 참 좋아한다.  그의 시선엔 따듯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가 여성전사들과 한판 전투를 벌일 때에도 '이유가 있을꺼야'라는 식의 두둔이 앞섰다.
이번 칼럼 앞부분을 읽으면서는 솔직히 불편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곧 그의 더 큰 기대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더 큰 기대는 감동이기도 하였지만, 오늘이 있기까지를 잊지말자는 '매'였던 것이다.

'아직 우리 서럽지 않은가'
그는 '우리'였던 것이다.

아침햇발
미완의 혁명

미완의 혁명. 사월을 이른다. 그래서였다. 시인이 '갈아엎는 달'로 사월을 노래한 까닭은. 2004년 사월도 그렇다. 국회를 바꿨다. 40년 넘게 입법을 쥐락펴락 한 수구세력이 절반 아래로 밀려났다. 사월혁명이 무너진 뒤 처음으로 진보정당이 국회에 진출했다.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었다는 찬가도 들린다.
축하할 일이다. 권영길과 단병호를 보라. 노동자·농민운동을 지며리 펼쳐온 국회의원들을 보라. 아름답지 않은가. 의원의 특권을 버리겠다는 다짐은 미덥다. 세비에서 노동자 평균임금만 받겠다는 결의는 눈부시다. 언젠가 이 땅에서 진보정당이 의석은 물론, 집권할 그날이 온다고 칼럼을 써온 '언론노동자'로서도 반가운 일이다.

다만 이제는 톺아볼 때다. 과연 민주노동당은 축배를 들어도 좋은가. 오해없기 바란다. 10석의 의석을 과소 평가할 뜻은 전혀 없다. 민주노동당 의원 10명이 거뜬히 40명 몫을 하리라는 민중의 기대에 동의한다.

그러나, 아니, 그래서다. 진드근히 묻는다. 민주노동당은 총선 승리자인가. 답은 다 안다. 아니다. 승리는 열린우리당 몫이다. 민주노동당은 지역구 243석에서 두 석을 얻었다. 아직 민중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물론, 첫술에 배부를 순 없다. 하지만 지금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참으로 '복기'해 볼 문제는 다음이 아닐까.

"10석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보라. 노무현 정권의 실정에 얼마나 실망이 컸던가. 노동자·농민·빈민들이 얼마나 세상을 떴는가. '야당'인 한나라·민주·자민련은 탄핵으로 민심을 잃었다. 그런데도 하나뿐인 '참 야당'이 지역구서 얻은 것은 두 석이다. 한 석은 권영길, 한 석은 울산이었기에 그나마 가능했다.

게다가 다른 진보정당은 법적 해산을 피할 수 없다. 한국노총의 녹색사민당은 이미 해산했다. 사회당과 녹색사민당은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에 회담을 제의했다. 민주노동당은 총선 뒤에 만나자고 거부했다. 그래서다. 민주노동당 지도부, 10명의 당선자들에게 묻는다. 열 석을 얻은 민주노동당이 다른 진보정당에 웅숭깊은 눈길을 보내길 바란 것은 과연 '무리'인가.

오늘, 민주노동당이 들어선 길은 탄탄대로가 아니다. 차라리 가시밭길이다. 미처 가늠 못한 걸림돌이 곰비임비 불거질 수 있다. 그래서다. 겸손할 때다. 충정으로 당부하고 싶다. 덧셈을 마음 속셈으로만 하지말고 몸으로 익혀라. 민주와 진보 그리고 통일을 다르게 고민하는 이들에게 더는 뺄셈의 '딱지'를 붙이지 말라. 지역구 두 석과 비례대표 여덟 석에서 덧셈을 고심할 섟에 뺄셈에 머문다면 어쩌려는가. 목표가 집권이 아니던가.

'전투적 뺄셈'의 자세가 민주노동당 모두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무시해도 좋을 정도는 아니다. 분명히 말하자. 민주노동당도 이제 국회에 들어섰다. 지금보다 더 개량화 하라고 주문할 생각은 결코 없다. 정반대다. 앞다퉈 개량을 요구하는 저 '부자신문'들을 보라. 진보정당을 보는 부자신문의 흘게눈은 앞으로 더 살천스럽고 언구럭도 더 잦을 터이다.

수구세력의 훌닦는 비난엔 단호한 뺄셈으로 답하되, 민주·진보세력의 우호적 비판엔 겸허한 덧셈으로 답해야 옳다. 민주노동당 당원이 날마다 늘어나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뜻이 같은 사람을 더 모으고 힘을 더해 가기는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 중요한 과제로 놓여있다. 본디 운동은 '사람사업' 아니던가.

그렇다. 진보정당은 오늘 요람에 있다. 커가야 하지 않은가. 누구와 맞서 싸우고 누구와 어깨동무할 지 성찰이 필요하다. 축배를 들되 소외당한 모든 이를 돌아볼 때다. 17대 국회 4년을 어떻게 구상하고 실천하느냐가 2008년 총선을 좌우한다. 민중의 마음을 얻는다면,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진보정당의 집권은 얼마든지 현실이 될 수 있다. 장미가 아니라 진달래 열 송이 건네는 까닭이다. 아직 우리 서럽지 않은가.

그래서다. 사월을 속절없이 보내며 쓴다. 서러운 다짐으로 쓴다. 혁명은 아직 오지 않았다. 사월은 우리에게 다시 남겼다. 미완의 혁명을. 손석춘 논설위원 songil@hani.co.kr
(인터넷한겨레 200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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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완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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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춘(2001). <<아름다운 집>>. 서울 : 들녘.

손석춘의 소설.
픽션과 논픽션 사이에 위치한 소설이다.

이 책은 '북한체제의 경직과 몰락'이 주제가 아니다.
'아름다운 집'을 짓고자 했던 사람과 그가 겪은 세월에 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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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춘(2002). <<R통신>>.  서울 : 한겨레신문사.

지금은 서비스되지 않는 '한겨레뉴스메일'에서 손석춘이 독자들에게 보낸던 글모음.
기자들이 취재하면서 있었던 일이나 생각들을 담았던 뉴스메일.
기사가 아니고 기자를 느낄 수 있었던 글들의 모음.

나의 경우 뉴스메일을 통해서 읽었던 글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다시 읽을 가치가 있는 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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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춘(2002). <<부자신문 가난한 독자>>. 서울 : 한겨레신문사.

부자신문의 논리를 신문을 통해 자신의 논리로 체화하는 가난한 독자에게 바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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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춘(2000). <<여론읽기 혁명>>. 서울 : 한겨레신문사.

<한겨레>에 연재했던 '손석춘의 여론읽기'를 모은 책이다.
나의 경우 신문연재는 재미나게 읽었는데 그래서인지 책은 재미가 없었다.
새로울 것이 없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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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춘(1997). <<신문 읽기의 혁명>>. 서울 : 개마고원.

신문 읽기의 교과서로 좋은 책.
혁명까지는 아니지만 재미정도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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