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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6.01 [people] '김형율'

김형율,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김형율 원폭2세 환우회장 숨져

‘버섯구름’ 상흔과 사투 불꽃삶 35년
한·일정부 상대 생존권 투쟁
내달 특별법 제정 씨 뿌리고…


원폭 피해자 2세의 권익을 위한 싸움의 맨 앞줄에 서서 한국과 일본 정부를 상대로 왕성하게 활동해온 한국원폭 2세 환우회 회장 김형율(35·사진)씨가 29일 오전 9시5분 부산시 동구 수정동 자택에서 숨졌다.

김 회장은 20일부터 사흘 동안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국제연대협의회 심포지엄에 다녀온 뒤 급속히 건강 상태가 나빠졌다. 가족들은 그가 이날 아침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쓰러졌으며, 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숨졌다고 전했다.

그의 짧은 삶은 이름 모를 병마와 싸워야 했던 전반기와, 원폭 2세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역사’를 뒤늦게 알고 반핵·인권·평화운동가로 나선 후반기로 나뉜다. 2기 삶의 시작은 31살 때인 2001년이었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인 1983년 급성폐렴으로 병원 신세를 지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원인 모를 병으로 삶의 고비들을 숱하게 넘어야 했다. 중학교 졸업 이후 검정고시를 거쳐 부산 동의전문대학을 나와 두 번 취직했다. 그러나 잦은 병치레로 한번은 6개월 만에, 또 한 번은 1개월 만에 직장을 그만둬야 했다.

그는 95년에야 자신이 ‘선천성 면역글로블린 결핍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병이 어머니로부터 유전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알았다. 그의 어머니는 45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폭 방사능에 노출된 뒤 최근까지도 종양과 피부병 등 원폭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의 폐기능은 지난 몇 해 동안 30% 정도만이 남아 있었다. 약간의 찬바람도 생명에 치명적이었다. 한여름에도 두터운 외투를 벗을 수 없었다. 그러나 40㎏도 안 되는 마른 몸에도 원폭 2세들의 인간다운 삶을 요구할 때는 단호한 목소리의 투사로 변했다. 의사가 고개를 가로저을 정도의 상태에 빠진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조금만 몸이 좋아지면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원폭 2세들에 대한 실태조사와 생존권 보장을 촉구했다.

그는 생전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아파서 입원할 때마다 지쳐가는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너무나 죄스러웠고, 인정받지 못하는 삶이 고통스러웠다”며 “내 문제는 개인 문제가 아닌 사회 구성원 전체가 공유하고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의 노력은 2002년 원폭 2세 환우회, 이듬해 원폭 2세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 결성에 이어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의 원폭 2세들에 대한 실태조사로 이어졌다. 그가 그렇게 요구했던 ‘원자폭탄 피해자 진상규명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안’(가칭)은 다음달 임시국회에서 발의될 예정이다.

그가 숨지기 이틀 전에 보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전자우편 끝자락에는 평소 그가 즐겨 쓰던 문구가 들어 있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김씨의 주검이 안치된 부산대병원 영안실에는 이날 밤 늦게까지 일제강제동원피해자 진상규명위원회 최봉태 사무국장과 원폭피해자협회 관계자, 정신대 할머니를 위한 시민모임 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30여명이 찾아 그의 뜻있는 삶을 기렸다. 김씨의 가족들은 애통함 속에서도 담담하게 김씨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형 김진곤(41)씨는 “동생이 끊임없는 고통 속에 살아야 했기에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면서도 “짧은 삶을 살다간 동생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원폭 2세들에 대한 대책이 세워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장례식은 31일 아침 8시30분, 부산대병원 영안실. (051)240-7843.
박영률 김남일 기자 ylpak@hani.co.kr
(인터넷한겨레 2005/05/29)



먼저 나는 김형율, 그를 한 번도 만난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그를 알고 있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나에게 미안함이고, 부끄러움이다.

01.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02년 민주노동당에서다.
뉴스를 보니 그가 원폭 피해자 2세로서, 운동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 것은 2001년.
다음해인 2002년 지방선거 때 그를 알게 됐다.
선거 때면 여러 단체에서 정당에 질의서라는 것을 보낸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우리에게 이런이런 어려움이 있다.',
'너희 당은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너희 당의 대안은 무엇이냐?' 가 담긴 질의서다.
이 질의서에 대한 답변서를 토대로 개별 단체는 '지지성명'을 낸다.
그는 원폭 피해자 2세들의 처지를 알리기 위해서 한나라당, 민주당(현재 열린우리당), 민주노동당에 질의서를 보냈다.  그런데 답변서를 보내온 정당은 민주노동당뿐이었다고 한다.  
그의 정치적 취향 같은 것들과 상관없이, 선택의 여지 없이 그렇게 그는 민주노동당과 인연을 맺게 됐다.  그러나 당시나 지금이나 당이 그에게 해준 것은 하나도 없다.  그것이 오늘도 다름없는 민주노동당의 현실이다.  
그 때 인연을 시작으로(김형율씨는 오늘날까지 이제는 발걸음이 뜸한 김석준 교수님의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는 사람이 되었다.) 김형율씨는 당 안팎의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됐다.  언니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만난적은 없지만 그를 알게 됐다.

02.
언젠가 말한대로 언니는 역사교사이고, 또 일본군강제위안부 할머니들을 돕는 모임에 있어 그와 계속해서 연락이 닿았다.  이런저런 모임에 김형율씨를 초청하고, 또 그의 집까지(그는 수정동 비탈진 곳에 있는 낡은 아파트에 살았다.) 찾아가거나 하는 식으로 인연이 이어졌다.  
나와의 인연, 만난적이 없으니 인연이랄 수도 없지만,도 언니에게서 그의 소식을 듣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의 소식은 주로 그가 처한 어려움에 대한 것이었고, 언니와 내가 나누는 것들도 안타까움의 탄식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지난 달 언니가 나에게 한 가지 조언을 구했고, 한 가지 부탁을 했다.






△ 하타세미나에서 김형율씨 photo by 언니


03.
김형율씨는 원폭 피해자 활동을 위해 합천을 오간다.

합천에는 원폭 피해자가 많이 산다.  그 이유는 일제강점기 이주정책과 농업의 실패로 합천 사람들이 일본 히로시마에 많이 이주했기 때문이다.  김형율씨 어머니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고.  전쟁이 끝나고 아픈 몸으로 돌아올 곳은 그래도 고향 합천이었나보다.  그래서 합천에 많은 원폭 피해자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전쟁 피해자였지만 일본정부와 한국정부로부터 외면 당했다.  일본정부로서는 덮고 싶은 마음이 강했고 그래서 박정희 정권에서 맺은 한일협정 때 준 푼돈을 들어 무마하려 했고, 한국정부로서는 책임은 지기 싫지만 받은 돈이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세상이 변했는지, 아니면 당연한 것이었는지 일본정부는 원폭 피해자 1세대에 한해 증빙과정을 통해 치료를 해주기로 하였다(물론 증빙과정에 대한 절차상의 문제가 많다.).  그러나 김형율씨와 같은 원폭 피해자 2세의 경우는 아직 아무런 대책이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그가 이 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원폭 피해자 2세 대부분은 심한 장애를 앓고 있거나 드러난 장애가 없어도 김형율씨처럼 정상적인 거동과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원폭 피해자 2세의 경우 전쟁 피해자로서 문제 인식이 있는 사람들은 거동 자체가 불가능한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또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이를 사회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혼자 싸워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활동을 위해 합천을 오가는데 그의 폐가, 기관지가 말을 듣지 않아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택시를 대절하여 합천을 오갔다.  언니가 조언을 구해온 부분이 그가 합천을 오가는 교통편 마련 방법에 대한 것이다.

그의 어려운 사정을 들은 한 종교인이 적지않은(수백만원일 것이라 추측만한다.) 금액을 후원금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그는 그 후원금을 거절했다.
그 종교인은 나눔의 집-일본군강제위안부 할머니들의 쉼터-을 일군 사람으로 알만한 사람은 아는 승려다.  그런데 일련의 불미스런 사건으로 나눔의 집에서, 그리고 시민사회에서 퇴출당하듯 나오게 되었다.  그 승려가 부산의 한 사찰에 있었나보다.  어쨌거나 김형율씨의 사정을 듣고 후원금을 내놓았으며, 신자들을 조직하여 합천을 오가는 교통편을 돕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그 제안을 김형율씨가 거절한 것이다.
김형율씨는 그 제안을 받고 인터넷을 통해(인터넷, 몸이 아픈 사람들이 세상과 만나는 통로인 것이다.) 그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해서 알아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군강제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일한 그 승려가 결국 그 할머니들에게 상처를 주었다는데, 김형율씨는 할머니들을 같은 전쟁 피해자로 생각했다, 그런 사람과 손잡을 수 없다는 것이, 그런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김형율씨의 결론이었다고 한다.  김형율,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언니와 나는 그 승려의 (세상말로) 수완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제안을 거절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 승려라면 사람들이 도움을 주지도, 관심을 가지지도 않는 원폭 피해자 문제를 나눔의 집처럼 대중화시킬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김형율씨의 생각이 그러했기에 그의 결론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합천으로의 교통편은 부산에서 합천으로 귀농한 몇몇 분의 모임, 이들이 모임을 위해 부산과 합천을 오간다고 한다,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일단락지었다.
그런데 언니는 이 교통편 건의 결과를 김형율씨에게 알려주지 못했다.  그런 채로 김형율씨가 세상을 뜬 것이다.
그래서 언니는 더욱 미안해 했다.

04.
언니가 나에게 부탁한 것은 김형율씨를, 원폭 피해자들의 활동을 기록해 줄 사람이 없냐는 것이었다.  내가 영상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래저래 알 것이라 생각을 했나보다.
막막했다.
부산의 영상운동, 미디어운동의 상황을 알기에 더욱 막막했다.  평상필름이 떠올랐지만 그 모임 역시 각종 영상제작교육과 지율 스님을 기록하는 일로 눈코 뜰 사이가 없다.
그 외 딱히 떠오르는 모임, 사람이 없었다.  이 일을 누가 할 것인가.  고민은 길었지만 답이 없었다.

그러다 서울 모임에 참석해서 진주에서 온 영상활동가를 만났다.  그에게 사정이 이러한데 도와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  그의 생각은 할 수는 있지만 가능하면 김형율씨와 함께 하는 활동가, 혹은 합천지역의 활동가들을 교육하여 그들이 직접 기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 영상제작교육을 맡아줄 수는 있다고 하였다.  이 사람을 지난 일요일 전주에서 다시 만났다.  조만간 영상제작교육 도움을 청하겠노라고 다시 말을 해 놓았다.
그런데 월요일 신문에 김형율씨의 죽음이 났다.

신문에 난 그의 사진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였다.

언니가 기록해 줄 사람을 부탁하였을 때 나는 누군가를 소개해주는 것이 내 일일뿐 내가 그 일을 직접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음 속 깊숙하게는 나는 영상활동가가 아니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고, 겉으로는 나는 영상을 잘 다루지 못한다는 핑계도 있었다.

2년 전 일본군강제위안부인 이용수 할머니를 만났을 때도 비슷한 고민에 머물었지만 나는 결국 그 고민을 내 마음 속에서 밀어내고 말았다.  할머니는 자신의 이야기를 새롭게 기록하고 싶어 하셨다.  정대협의 증언채록이 맘에 안드셨던 게다.  그런데 그 때는 대구에, 영상활동영역에 연고가 없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혼자 결론내고 말았다.

그런데 막상 그가 허망하게 세상을 뜨고 나니 그가 필요했던 것은 영상이 아니라 사진일 수도 있고, 사진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줄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꼬박꼬박 따지고 들면 부족해도 영상을 다룰 수도 있는 일이었고, 많이 부족하다면 사진으로 기록할 수도 있는 일이었고, 그것이 안되면 그의 활동을 알려줄 글을 쓸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의 죽음은
내가 무엇하자고 미디어교육을 하고 미디어운동을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
나를 미안하고 부끄럽게 만든 죽음이었다.


할머니들도 한 분, 두 분 세상을 뜨신다.
그리고 또 다른 김형율들도 그냥 그렇게 죽어가고 있다.
'우선순위'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얻은 깨달음이라기에 너무 보잘 것 없지만 매 순간 새겨야겠다.

05.
그가 누워있는 병원에 다녀온 언니가 그의 사인을 이야기 해주었다.
아픈 것이 사인이기도 하겠지만 '과로'란다.
그는 올해가 광복 60주년인데 많은 의미를 부여했고, 그래서 많은 활동을 해왔다고 한다.
6월에 민주노동당 조승수 의원이 원폭 피해자를 위한 대책 법안 발의를 준비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나보다.
어머니는 몸 생각하라며 그의 활동을 만류해왔지만 그는 병원도 걸러가며 각종 모임에 나가 원폭 피해자 문제를 이야기했다.
결국 29일 새벽 피를 토하고 그가 쓰러졌고 병원에 옮겼을 때 이미 심장은 멎었다고 한다.

그가 죽음으로써 더 이상 이 문제를 이야기해줄 사람이 없지 않을까, 이에 대한 활동이 정체되지 않을까 하는 것은 단지 나에 기우에만 머물기를 바란다.



故 김형율씨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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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닥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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