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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3.11.10 [song] '92년 장마, 종로에서'

01.
지난 여름, 서울서 들었던 강좌에서 한 선생님이 이야기했다.
80년대 후반 서울을, 꼭 서울뿐 아니라 변화하는 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90년대 이후에 느꼈던 공황감에 대해서.
그 공황감이 담긴 노래가 '92년 장마, 종로에서'라고 했다.

오늘 저녁 본 일요스페셜에서 김민기가 또 한번 말했다.
90년대 이후 사람들이 느끼게 된 '정신적 공황감'에 대해서.
그것이 그의 '지하철 1호선'에 나오는 학생운동권 '안경'이 가짜 대학생 '안경'으로 바뀌게 되는 배경을 제공했다고 했다.
주의, 주장이 공허하게 들리기 시작한 시점에서 '안경'은 바뀌게 된 것이다.

김민기의 말을 듣고 떠오른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들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고서 채널을 돌렸다.
9시 뉴스데스크를 보던 나는 텔레비전 앞에서 얼어붙었다.

첫 뉴스에 노동자들은 화염병을 던졌다.
양어깨를 붙잡혀 가던 노동자는 경찰의 검고 딱딱한 군화발에 무너졌다.
연행되어 머리를 숙이고 웅크리고 앉아있는 노동자는 얼굴에 피범벅을 하고 있었다.
경찰의 발길질과 방패, 그리고 노동자의 화염병이 화면에서 어지럽게 뒤섞이고 있었다.



바로 2003년 종로에서.


02.
92년 장마, 종로에서 / 정태춘·박은옥


모두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탑골공원 담장 기와도 흠씬 젖고
고가 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
건너 빌딩의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
비는 내리고
장마비 구름이 서울 하늘 위에
높은 빌딩 유리창에
신호등에 멈춰서는 시민들 우산 위에
맑은 날 손수건을 팔던 노점상 좌판 위에
그렇게 서울은 장마권에 들고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 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워, 워..
저기 우산 속으로 사라져 가는구나
입술 굳게 다물고 그렇게 흘러가는구나.
워, 워..


비가 개이면
서쪽 하늘부터 구름이 벗어지고
파란 하늘이 열리면
저 남산 타워 쯤에선 뭐든 다 보일게야
저 구로 공단과 봉천동 북편 산동네 길도
아니, 삼각산과 그 아래 또 세종로 길도
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 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
보라, 저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훠이, 훠이.. 훠이, 훠이..
빨간 신호등에 멈춰 섰는 사람들 이마 위로
무심한 눈빛 활짝 열리는 여기 서울 하늘 위로
한무리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훨, 훨, 훨..


03.
아마도 '정신적 공황감'이란,
있던 것이 없어지는 것에서 오는 상실감이 아니라
있던 것이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없다라고 인정하기를 강요받기 때문에 오는 불안함이 아닐까.


04.
그러나,
알고보면 그 공황감이라는 것도
배운 자들의, 가진 자들의 사치가 아닐까.
나 같이 몽상만 하는 자들의.

답답하구나.

사진출처
- 인터넷한겨레 '노동자 5만명 도심 격렬시위'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3/11/005000000200311100029001.html


여기서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끝입니다.

Posted by 토닥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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