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베스트극장
'떠나요 삐삐 롱스타킹'


극  본 : 장민석
연  출 : 황인뢰
조연출 : 김도형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가 극적영감을 주었다는 황인뢰의 드라마.

남해 바닷가 금화장 여관을 지키는 수철에게는
중풍으로 거동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자신이 말광량이 삐삐라고 생각하는 정신지체의 누나가 있다.
그리고 수철에게는 소원이 하나 있다.
바로 생일인 12월 23일 서울에 놀러가는 것이다.

답답하고 어둡기 그지없는 이 드라마가 나에게 남은 이유는
내가 처한 현실과 수철이 처한 현실이 어떤 면에서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면이 닮아 있었는지 딱히 꼬집어 내기는 어렵지만.

나는 12월 24일 서울로 떠났다.




부산의 크리스마스를 피해 떠났던 서울.
서울역에서 나는 크리스마스의 직격탄을 맞고 말았다.



새로이 지은 서울역 앞에는 루돌프 사슴 코가 매우 반짝이고 있었고,
서울역 광장에는 Mr. Jesus의 어린 양들이 노래를 불러대고 있었다.
결국 크리스마스를 흠뻑 느끼고 말았다.

이열치열이라고 크리스마스엔 명동에 나갔다.
원래 계획은 영화를 보려고 하였으나 역시 크리스마스엔 무리였다.
그냥저냥 사람들의 흐름에 몸을 맡겨 남들이 하는 것처럼,
우리도 사람들처럼 명동에서 맛있는거 먹고, 커피 마시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유명하다고해서 가본 명동교자.
이름 값에 대한 첫번째 댓가는 줄 서기다.



지갑을 잃어버려 기분이 우~리했던 사과양의 얼굴1.



이름난 명동교자의 맛은 독특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매운 마늘 맛의 김치와 걸쭉한 육수의 칼국수.
먹어볼만 하다.
나름대로 부산이라는 갯가에서 먹어본 칼국수와는 색다른 맛.



어른들이 좋아할 맛인 것 같은데
애들도 좋은건 아는가보다.



지현선배의 모자를 한번 얻어쓴 사과양의 얼굴2.
(표정이 전혀 안우~리 하잖아?(^^*))



지난 여름 친구네에 머물면서 알게된 pascucci.
해운대 스펀지몰에도 한 곳 생겼다.
커피 맛이 좋다.
물론 java coffee만은 못하지만.(^^ ):



친구 미주.
예전에 옷 광고 중에 그런 멘트, 카피가 있었다.
일년을 입어도 십년 같은 옷, 십년을 입어도 일년 같은 옷.
내겐 그런 친구다.

이후 생략.( - -)

오늘 집으로 돌아오면서 친구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 서울행은 아쉬움이 많다'고.
만나려고 했던 사람과는 연락 조차도 안되고
그냥 열심히 놀다가만 왔다.
사람들 만나고 노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스스로에게 말하지만,
마음이 무거워 지는 이유는?

..

수철은 결국 진주와 생일에 서울로 여행을 떠난다.
잠시나마 그를 짓누르던 현실을 잊고.
그렇게 경쾌하게 드라마는 끝났지만
아쉽게도 현실은, 그를 짓누르던 현실을 그대로일 것이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수철의 현실과 닮아 있는 나의 현실도.

그러나,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은 분명 정신건강에 좋은 행위이다.
신체건강에는 다소 나쁠 수도 있다.  피곤하니까.(. . ):

그래도, 떠나요.


여기서 '떠나요 삐삐 롱스타킹'는 끝입니다.

Posted by 토닥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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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망명자로, 이주노동자로 23년간 프랑스에서 살아오신 홍세화선생님.

지치고 힘든 어느날 외국인 친구가 건네준 잡지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었단다.

1930년대 프랑코 독재에 항거,
조국 스페인을 떠난 2만여 명의 망명객들을 위해 그 망명객들이 만든 잡지.
그 잡지에 수염 하얀 노인이 이렇게 말했단다.

"우리 인생은 실패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그 기억만으로도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다."

그 노인이 불렀던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니지만
나는 오늘 또 한곡의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들었다.

민중가요도, 투쟁가도 없던 시절 젊은 홍세화들이 대학로에서 불렀던 노래.
그 노래가 있기에, 그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있기에
오늘날의 그가 있는지도, 과거보다 조금 나은 오늘이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끝입니다.

Posted by 토닥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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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본지 일년도 더 됐는데 갑자기 떠올린 이유는,
절대로 한 선배가 일년도 더 전에 빌려간 같은 이름의 책을 돌려주지 않아서가 아니다.
(대체 언제 줍니까?(__+))

며칠 전 술을 마시고 1시쯤 집에 오려고 할때 였다.
집이 너무너무 먼 나는 학생을 빙자한 백수의 신분임을 잠시 잊은채
'한 잔 더하고 택시 타고 갈까?'하고 생각하였다.
그곳이 양정이었는데 말이다.
(택시비가 2만5천원에서 3만원쯤 나온다.(__+))

나는 잠시 잊었던 학생을 빙자한 백수 신분을 떠올리고
'그냥 친구집에서 자고 갈까?'하고 생각하였다.
내 나이가 어언- ○7살임을 다시 상기하고 집으로 가기로 했다.
(나이 들어 밖에서 자면 여러모로 괴롭다.(__+))

아쉬운 마음을 접고 버스에 올랐다.
짐이 많았던 관계로, 그것도 꽤나 비싼 짐이 많았던 관계로 졸 수도 없는거다.
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보던 중, '풉-'하고 이 영화가 생각났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소개팅 뒤에,
밤 거리에 알싸하게 취한 연희가 말했다.
"왔다갔다 택시 비용보다 여관비가 더 쌀 것 같다"고.
그래서 그들은 소개팅 첫날 여관으로 간다.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한다고 거짓말 할 자신'이 없는 준영.
그리고,
준영과의 관계에 '난 자신있어. 절대로 들키지 않을 자신!'이라고 말하는 연희.

그들의 대사와 상황이 솔직해서,
그래서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이 솔직하다고 생각하는가?,
있을 수도 있는 일이란 생각이 술 마시고 돌아오던 그날 밤 들었다.

택시비, 왕복은 둘째치고 편도라도,보다 여관비가 쌀 수 있다는 말이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재미난 영화다.


여기서 '택시비와 여관비의 관계'는 끝입니다.

Posted by 토닥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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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일 1st - <오래된 미래> (2003/11)

새로 나온 앨범을 살펴보다 발견하게 된 앨범.
긴 말 않고 '감동'이다.

늘 있던 것에 대한, 그래서 있는지 느끼지도 못한 것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
마치 언제나 옆에 있어서 몰랐던 사람의 얼굴을 새삼스레 보는 느낌.
또는 언제나 앞에 있어서 보지 못했던 가까운 사람의 옆 얼굴을 보는 느낌.

감동!

들어보고 싶다면,
http://music.bugs.co.kr/Info/album.asp?album=19119

Posted by 토닥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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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의 '고향(故鄕)'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차중에서 생긴 일이다. 나는 나와 마주 앉은 그를 매우 흥미있게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두루마기 격으로 기모노를 둘렀고, 그 안에서 옥양목 저고리가 내어 보이며 아랫도리엔 중국식 바지를 입었다.  그것은 그네들이 흔히 입는 유지 모양으로 번질번질한 암갈색 피륙으로 지은 것이었다. 그리고 발은 감발을 하였는데 짚신을 신었고, 고무가리로 깎은 머리엔 모자도 쓰지 않았다. 우연히 이따금 기묘한 모임을 꾸민 것이다.  우리가 자리를 잡은 찻간에는 공교롭게 세 나라 사람이 다 모였으니, 내 옆에는 중국 사람이 기대었다.  그의 옆에는 일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동양 삼국옷을 한몸에 감은 보람이 있어 일본말도 곧잘 철철 대이거니와 중국말에도 그리 서툴지 않은 모양이었다.
  "고꼬마데 오이데 데스까?(어디까지 가십니까?)"하고 첫마디를 걸더니만, 도꼬가 어떠니, 오사까가 어떠니, 조선 사람은 고추를 끔찍이 많이 먹는다는 둥, 일본 음식은 너무 싱거워서 처음에는 속이 뉘엿걸다는 둥, 횡설수설 지껄이다가 일본 사람이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짧게 끊은 꼿꼿한 윗수염을 비비면서 마지못해 까땍까땍하는 고개와 함께 "소데스까(그렇습니까)"란 한 마디로 코대답을 할 따름이요, 잘 받아 주지 않으매, 그는 또 중국인을 붙들고서 실랑이를 하였다.  "니상나열취……" "니싱섬마"하고 덤벼 보았으나 중국인 또한 그 기름낀 뚜우한 얼굴에 수수께끼 같은 웃음을 띨 뿐이요 별로 대구를 하지 않았건만, 그래도 무어라고 연해 웅얼거리면서 나를 보고 웃어 보였다.
  그것은 마치 짐승을 놀리는 요술장이가 구경꾼을 바라볼 때처럼 훌륭한 재주를 갈채해 달라는 웃음이었다.  나는 쌀쌀하게 그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 주적대는 꼴이 어줍지 않고 밉살스러웠다.  그는 잠깐 입을 닫치고 무료한 듯이 머리를 덕억덕억 긁기도 하며, 손톱을 이로 물어뜯기도 하고, 멀거니 창 밖을 내다보기도 하다가, 암만해도 중절대지 않고는 못 참겠던지 문득 나에게로 향하며,   "어디꺼정 가는 기오?"라고 경상도 사투리로 말을 붙인다.
  "서울까지 가요."
  "그런기오. 참 반갑구마. 나도 서울꺼정 가는데. 그러면 우리 동행이 되겠구마."
  나는 이 지나치게 반가와하는 말씨에 대하여 무어라고 대답할 말도 없고, 또 굳이 대답하기도 싫기에 덤덤히 입을 닫쳐 버렸다.
  "서울에 오래 살았는기요?" 그는 또 물었다.
  "육칠년이나 됩니다." 조금 성가시다 싶었으되, 대꾸 않을 수도 없었다.
  "에이구, 오래 살았구마, 나는 처음길인데 우리 같은 막벌이군이 차를 내려서 어디로 찾아가야 되겠는기요? 일본으로 말하면 기전야도 같은 것이 있는기오?"
하고 그는 답답한 제 신세를 생각했던지 찡그려 보았다.  그때 나는 그의 얼굴이 웃기보다 찡그리기에 가장 적당한 얼굴임을 발견하였다. 군데군데 찢어진 겅성드뭇한 눈썹이 올올이 일어서며, 아래로 축 처지는 서슬에 양미간에는 여러 가닥 주름이 잡히고, 광대뼈 위로 뺨살이 실룩실룩 보이자 두 볼은 쪽 빨아든다.  입은 소태나 먹은 것처럼 왼편으로 삐뚤어지게 찢어 올라가고, 죄던 눈엔 눈물이 괸 듯 삼십 세밖에 안되어 보이는 그 얼굴이 10년 가량은 늙어진 듯하였다.  나는 그 신산스러운 표정에 얼마쯤 감동이 되어서 그에게 대한 반감이 풀려지는 듯하였다.
  "글쎄요, 아마 노동 숙박소란 것이 있지요."
노동 숙박소에 대해서 미주알고주알 묻고 나서,
  "시방 가면 무슨 일자리를 구하겠는기오?"라고 그는 매달리는 듯이 또 꽤쳤다.
  "글쎄요, 무슨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는지요."  나는 내 대답이 너무 냉랭하고 불친절한 것이 죄송스러웠다.  그러나 일자리에 대하여 아무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이외에 더 좋은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대신 나는 은근하게 물었다.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흠, 고향에서 오누마."하고 그는 휘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그의 신세타령의 실마리는 풀려 나왔다.  그의 고향은 대구에서 멀지 않은 K군 H란 외따른 동리였다.  한 백호 남짓한 그곳 주민은 전부가 역둔토를 파먹고 살았는데, 역둔토로 말하면 사삿집 땅을 부치는 것보다 떨어지는 것이 후하였다.  그러므로 넉넉지는 못할망정 평화로운 농촌으로 남부럽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뒤바뀌자 그 땅은 전부가 동양 척식 회사의 소유에 들어가고 말았다.  직접으로 회사에 소작료를 바치게 되었으면 그래도 나으련만 소위 중간 소작인이란 것이 생겨나서 저는 손에 흙 한 번 만져 보지도 않고 동척엔 소작인 노릇을 하며, 실지인에게는 지주 행세를 하게 되었다.  동척에 소작료를 물고 나서 또 중간 소작료인에게 긁히고 보니, 실작인의 손에는 소출이 3할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후로 <죽겠다, 못 살겠다>하는 소리는 중이 염불하듯 그들의 입길에서 오르내리게 되었다.  남부여대하고 타처로 유리하는 사람만 늘고 동리는 점점 쇠진해갔다.
  지금으로부터 9년 전, 그가 열일곱 살 되던 해 봄에(그의 나이는 실상 스물여섯이었다.  가난과 고생이 얼마나 사람을 늙히는가?) 그의 집안은 살기 좋다는 바람에 서간도로 이사를 갔었다.  쫓겨가는 운명이거든 어디를 간들 신신하랴.  그곳의 비옥한 전야도 그들을 위하여 열려질 리 없었다.  조금 좋은 땅은 먼저 간 이가 모조리 차지하였고 황무지는 비록 많다 하나 그곳 당도하던 날부터 아침거리 저녁거리 걱정이랴. 무슨 행세로 적어도 1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먹고 입어 가며 거친 땅을 풀 수가 있으랴.  남의 밑천을 얻어서 농사를 짓고 보니, 가을이 되어 얻는 것은 빈주먹뿐이었다.  이태 동안을 사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버티어 갈 제, 그의 아버지는 망연히 병을 얻어 타국의 외로운 혼이 되고 말았다.  열아홉 살밖에 안된 그가 홀어머니를 보시고 악으로 악으로 모진 목숨을 이어가는 중 4년이 못되어 영양 부족한 몸이 심한 노동에 지친 탓으로 그의 어머니 또한 죽고 말았다.
  "모친까장 돌아갔구마."  "돌아가실 때 흰죽 한 모금도 못 자셨구마."하고 이야기하던 이는 문득 말을 뚝 끊는다.  나는 무엇이라고 위로할 말을 몰랐다.  한동안 머뭇머뭇이 있다가 나는 차를 탈 때에 친구들이 사준 정종병 마개를 빼었다.  찻잔에 부어서 그도 마시고 나도 마셨다.  악착한 운명이 던져 준 깊은 슬픔을 술로 녹이려는 듯이 연거푸 다섯 잔을 마시는 그는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그후 그는 부모 잃은 땅에 오래 머물기 싫었다.  신의주로, 안동현으로 품을 팔다가 일본으로 또 벌이를 찾아가게 되었다. 규슈 탄광에 있어도 보고, 오사까 철공장에도 몸을 담아 보았다.  벌이는 조금 나았으나 외롭고 젊은 몸은 자연히 방탕해졌다.  돈을 모으려야 모을 수 없고 이따금 울화만 치받치기 때문에 한곳에 주접을 하고 있을 수 없었다.  화도 나고 고국 산천이 그립기도 하여서 훌쩍 뛰어나왔다가 오래간만에 고향을 둘러보고 벌이를 구할 겸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라 했다.
  "고향에 가시니 반가워하는 사람이 있습디까?" 나는 탄식하였다.
  "반가워하는 사람이 다 뮌기오, 고향이 통 없어졌더마."
  "그렇겠지요.  9년 동안이나 퍽 변했겠지요."
  "변하고 뭐고 간에 아무것도 없더마.  집도 없고, 사람도 없고, 개 한 마리도 얼씬을 않더마."
  "그러면, 아주 폐농이 되었단 말씀이오?"
  "흥, 그렇구마.  무너지다 만 담만 즐비하게 남았드마.  우리 살던 집도 터야 안 남았는기오, 암만 찾아도 못 찾겠더마.  사람 살던 동리가 그렇게 된 것을 혹 구경했는기오?"
하고 그의 짜는 듯 한 목은 높아졌다.
  "썩어 넘어진 서까래, 뚤뚤 구르는 주추는!  꼭 무덤을 파서 해골을 헐어 젖혀놓은 것 같더마.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기오?  백여호 살던 동리가 10년이 못 되어 통 없어지는 수도 있는기오, 후!"
하고 그는 한숨을 쉬며, 그때의 광경을 눈앞에 그리는 듯이 멀거니 먼산을 보다가 내가 따라 준 술을 꿀꺽 들이켜고,
  "참! 가슴이 터지더마, 가슴이 터져"
하자마자 굵직한 눈물 둬 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나는 그 눈물 가운데 음산하고 비참한 조선의 얼굴을 똑똑히 본 듯 싶었다.
  이윽고 나는 이런 말을 물었다.
  "그래, 이번 길에 고향 사람은 하나도 못 만났습니까?"
  "하나 만났구마, 단지 하나."
  "친척되는 분이던가요?"
  "아니구마, 한 이웃에 살던 사람이구마."하고 그의 얼굴은 더욱 침울했다.
  "여간 반갑지 않으셨지어요."
  "반갑다마다, 죽은 사람을 만난 것 같더마.  더구나 그 사람은 나와 까닭도 좀 있던 사람인데……"
  "까닭이라니?"
  "나와 혼인 말이 있던 여자구마."
  "하아!" 나는 놀란 듯이 벌린 입이 닫혀지지 않았다.
  "그 신세도 내 신세만 하구마."
하고 그는 또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그 여자는 자기보다 나이 두 살 위였는데, 한이웃에 사는 탓으로 같이 놀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며 자라났다.  그가 열 네살 적부터 그들 부모들 사이에 혼인 말이 있었고 그도 어린 마음에 매우 탐탁하게 생각하였었다.  그런데 그 처녀가 열일곱 살 된 겨울에 별안간 간 곳을 모르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 아버지되는 자가 20원을 받고 대구 유곽에 팔아먹은 것이었다.  그 소문이 퍼지자 그 차녀 가족은 그 동리에서 못 살고 멀리 이사를 갔는데 그 후로는 물론 피차에 한 번 만나 보지도 못하였다.  이번에야 빈터만 남은 고향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읍내에서 그 아내될 뻔한 댁과 마주치게 되었다.
  처녀는 어떤 일본 사람 집에서 아이를 보고 있었다.  궐녀는 20원 몸값을 10년을 두고 갚았건만 그래도 주인에게 빚이 60원이나 남았었는데, 몸에 몹쓸 병이 들어 나이 늙어져서 산송장이 되니까.  주인되는 자가 특별히 빚을 탕감해 주고, 작년 가을에야 놓아 준 것이었다.
  궐녀도 자기와 같이 10년 동안이나 그리던 고향에 찾아오니까 거기에는 집도 없고, 부모도 없고 쓸쓸한 돌무더기만 눈물을 자아낼 뿐이었다.  하루해를 울어 보내고 읍내로 들어와서 돌아다니다가, 10년 동안에 한 마디 두 마디 배워 두었던 일본말 덕택으로 그 일본 집에 있게 되었던 것이다.
  "암만 사람이 변하기로 어째 그렇게도 변하는기오? 그 숱 많던머리가 훌렁 다 벗을졌두마.  눈을 푹 들어가고 그 이들이들하던 얼굴빛도 마치 유산을 끼얹은 듯하더마."
  "서로 붙잡고 많이 우셨겠지요"
  "눈물도 안 나오더마.  일본 우동집에 들어가서 둘이서 정종만 열병 때려뉘고 헤어졌구마."
하고 가슴을 짜는 듯한 괴로운 한숨을 쉬더니만 그는 지난 슬픔을 새록새록 자아내어 마음을 새기기에 지쳤음이더라.
  "이야기를 다하면 뭐하는기오."
하고 쓸쓸하게 입을 다문다.
  나 또한 너무도 참혹한 사람살이를 듣기에 쓴물이 났다.
  "자, 우리 술이나 마자 먹읍시다."
하고 우리는 주거니받거니 한되 병을 다 말리고 말았다.  그는 취흥에 겨워서 우리가 어릴 때 멋모르고 부르던 노래를 읊조렸다.

  볏섬이나 나는 전토는 신작로가 되고요……
  말마디나 하는 친구는 감옥소로 가고요……
  담뱃대나 떠는 노인은 공동묘지 가고요……
  인물이나 좋은 계집은 유곽으로 가고요……




어젯 밤, 아니 오늘 새벽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이 소설이 생각났다.
사실 소설이었는지, 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끝구절만 입에서 맴돌아 잠자리를 뒤척였다.
외출에서 돌아와 검색창에,
'인물이나 좋은 계집은 유곽으로 가고요'를 찍어 넣었다.
소설이었구나.

'그 눈물 가운데 음산하고 비참한 조선의 얼굴…'

으흠-.( __)


여기서 '현진건의 고향(故鄕)'는 끝입니다.

Posted by 토닥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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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사랑방, 오마이뉴스와 결별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 창간이래 이 매체를 통해 꾸준히 인권관련 소식을 전해온 인권운동사랑방이 오마이뉴스에 결별을 선언했다.
인권운동사랑방은 4일 '인권하루소식'에 '오마이뉴스에 더 이상 기사를 싣지 않는 이유'를 통해 기사제공을 중단키로 했다고 밝혔다.

인권운동사랑방은 "지난달 20일 오마이뉴스는 메인화면 팝업창에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비준을 촉구하는 경제 5단체의 의견광고를 실었다"며 "현실의 권력관계에서 사회적 약자인 농민들을 생존의 벼랑 끝으로 떠미는 특정정책의 홍보광고를 싣는 것은 진보언론을 표방하는 오마이뉴스의 존재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라며 기사 제공 중단 배경을 설명했다.

인권운동사랑방은 이어 "오마이뉴스는 광고게재원칙에 대한 확인과정에서 '기사와 광고는 별개'라며 '향후에도 유사한 의견광고가 실릴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며 "광고와 기사가 별개라는 논리는 지극히 실용주의적 잣대이며, 오마이뉴스가 자성과 긴장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광고주에 휘둘리며 보수화의 길을 걸어갈 수 밖에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단체는 또 "경제5단체가 해당광고를 오마이뉴스에 게재하고자 한 원인이 된이 매체의 사회적 영향력은 '다른 언론'을 만들기 위해 땀과 열정을 바쳐온 수많은 기자회원들의 노력의 결실"이라며 "오마이뉴스는 이를 잊지 말고 바른 언론으로 거듭나라"고 촉구했다. 서울/연합뉴스
(인터넷한겨레 2003/12/04)



불구경이 재미난다는 말처럼 다른 집단들의 갈등이 반가운 것은 아니고
언젠가 나도 잘 들어가지 않는 <오마이뉴스>에 들어갔다 화들짝 놀란 일이 있다.
너무나 어이가 없었던 탓에 남겨둔 이미지.



그 언젠가는 친구가 찍은 한총련 수배학생 관련 사진을 보러 <오마이뉴스>에 들어간 때이다.
때가 때인지라 더 인상에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국가정보원 광고라.
그래, <오마이뉴스>도 언론사(社)인거지.

사실 나는 <오마이뉴스>에 대한 기대가 작은 편이다.
좋게 말해 기대가 작다는 것이고 싫어하는데, 이유는 나와 정치적 취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가 나쁘거나, 틀렸다는게 아니라 나와는 개인적인 취향과 다르다는 것이지.
(<오마이뉴스> 독자 및 지지자는 여기서 오해없길-.)

나의 취향과 같거나 말거나 <오마이뉴스>는 대단하다.
가끔, 수업을 듣다보면 자주, <오마이뉴스>를 폄하하는 말을 듣는다.
몰지각의 절정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대부분 <오마이뉴스>를 폄하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그거다, 기사의 질이 떨어진다는.
그런 말 들을 때 생각한다.
'바보 아이가?'  
어떻게 자본이 수십억대인, 수십억만되랴, 그래서 투자할 돈이 많은 페이퍼신문과 온라인 신문을
똑같이 비교하는가?
'비교'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야기가 잠시 다른 길로..(__ )a

<오마이뉴스>가 정치적 취향과 다르거나 말거나
나 역시 <오마이뉴스>의 당찼던 옛모습에 박수를 보내며
인권운동사랑방의 말처럼 <오마이뉴스>를 일궈온 수많은 기자회원들의 열정을 잊지 말기를 바랄뿐이다.


인터넷한겨레 기사읽기
- '인권운동사랑방, 오마이뉴스와 결별'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3/12/005000000200312041305633.html


여기서 '오마이뉴스'는 끝입니다.

Posted by 토닥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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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봄날 서울의 한 거리에 있었다.
서울의 어느 문 근처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동대문이었나보다.
그땐 지금보다 더 서울지리에 대한 개념이 었었던 터라 내가 두발 딛고 있는 곳이 어딘지 몰랐다.
거리에서 숨을 헐떡이며 물을 마시려고 머리를 드니 눈에 거리의 이름과 함께 방향이 표시된 파란색 표지판이 들어왔다.
"청계천 8가"
옆에 친구를 툭툭 쳤다.
"여기가 청계천이다."

가만히 옛기억을 되돌려보면 청계천에 가본 일이 없지도 않은데
그 시절 청계천이라는 곳은 새로운, 의미있는 지명이 돼있었던 것이다.
바로 "청계천 8가"라는 천지인의 노래 때문이었다.

지난 여름 이후 청계고가 철거에 이어 오늘은 청계천에 노점 철거가 있었다.
언뜻 주워 들은 이야기로 동절기엔 철거작업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아는데
겨울의 문턱에서 며칠전엔 상도동 철거, 오늘은 청계천 노점 철거가 있었다.

개발과 가난의 상징인 청계천.


△ 사진출처 인터넷한겨레 http://www.hani.co.kr

일요일 아침 7시반에 시작된 철거작업에 공무원+용역 3500여 명, 경찰 4500여 명이 투입되었다.
600여 노점을 철거하기 위해,
1500여 노점상의 저항을 막기 위해 8000여 명이 투입되었다.
청계천 7가와 8가에 바리케이트를 쌓고 불까지 질러가며 저항하던 노점상들은 11시를 넘기지 못했다.

조금전 mbc 뉴스데스크에서 본 상도동 골리앗이 눈에 남는다.
조금 우울하네.(__ )a
이제 추운데, 서울은 이미 추운데….


뉴시스 기사읽기
- '청계천 노점 강제철거, 노점상과 철거반원 대치'
  http://pr.newsis.com/demo/viewpage.php?key=550466&channel=36

한겨레 기사읽기
- '노점상 철거에 노숙자 동원'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3/11/005000000200311302224282.html


여기서 '청계천 8가'는 끝입니다.

Posted by 토닥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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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닌(1999). <<전쟁의 슬픔>>. 박찬규 옮김. 서울 : 예담.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과 닮은 책이다.
이른바 지난 시절에 대한 소설들은 그것이 푸념이거나, 후회이거나, 변명이거나, 과장이기 쉽다.
그러나 황석영의 소설이 그랬던 것 처럼
<<전쟁의 슬픔>>에서는 그 시대를, 베트남전쟁을 살아야 했던 젊은이들을 그리고 있다.

작가 김남일의 말처럼,
이 소설은 <<사이공의 흰옷>>처럼 단단하기만 한 베트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전쟁으로 '황폐'라는 단어 조차 사치스러울 것 같은,
회복 불능토록 부서져버린 베트남과 베트남 사람들을 보여줄 뿐이다.
부서진 것은 건물만이 아니다.
부서진 것은 그들의 삶이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누군가의 승리와 누군가의 패배가 중요하지 않다.
모두가 부서져 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전쟁이다.

Posted by 토닥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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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레(2002).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 하재홍 옮김. 서울 : 실천문학사.

베트남 사람을 이해하는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헐리우드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준 베트콩은
땅속으로 다니는 비열하고 이름 없는 게릴라일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비열하고 이름 없는 게릴라가 아니다.
그들은 침략에 맞써 싸운 수많은 '반레'들이었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 작가의 본 이름은 '레 지 투이'이다.
그런 그가 쓰고 있는 '반레'라는 이름은 전장에서 죽은 전우의 이름이다.
살아 남은 '레 지 투이'는 '반레'라는 이름으로
'반레'처럼 죽어갈 수 밖에 없었던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설 속에 나오는 응웬꾸앙빈은 단 한명의 베트남 사람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베트남 사람들의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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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닥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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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만호가 '출소' 했습니다.
구치소를 나온 것이니 '출소' 맞지요?

잊은건 아니었는데 어제야 문득 만호생각이 났습니다.
'아, 11월 10일이랬나? 11일이랬나?'
늘 만호소식을 전해주던 친구에게 전화를 하니 전화기가 꺼져 있더군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만호 동기 동현이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11일인 오늘이더군요.
마침 동현이도 공판에 가볼 생각이라기에 법원에서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아침에 법원까지 갈 길이 막막하더군요.
'그래도!', 마음을 다져먹고 가기로 했습니다.

아침에 잠을 설치고, 버스에서 졸고, 법원 안에서 헤매고 하여
9시 30분이라는 정해진 시간보다 조금 늦게 법정에 들어갔습니다.
남은 자리가 앞자리 밖에 없어서 부시럭거리며 앞쪽에 가서 앉았습니다.

살인, 강도살인, 특수강도, 사기, 횡령, 절도 등등 다른 사람들의 형을 판사가 읽고 있었습니다.
사람 뚫어져라 잘 보는 스타일인데
그 자리에선 그러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에 고개숙이고 수첩을 끄적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남았나 싶어 고개를 들어 법정 한가운데를 보니
만호가 제가 앉은 쪽을 바라보고 방긋 웃고 있더군요.
녀석, 웃음이 나오냐.(__+)

만호의 형은,
장기간 수배생활과 현재 사실상 한총련탈퇴와 같음을 이유(임기가 끝났잖아요.(__+))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입니다.

그리하여 11월 11일, 빼빼로데이에 만호는 부산주례구치소에서 출소하였습니다.(^^ )

사직동 법원에서 만호어머니와 함께 77번 버스를 타고 만호가 나올 주례구치소로 갔습니다.
나 같은 사람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흥분되는데 만호어머닌 오죽할까요.





시간 상으로 호송차보다 먼저 도착했을 것 같은데
만호어머닌 확인을 해봐야겠다며 종종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두부 사는 것도 잊었다며 어머님이 걱정하시길래 후배가 구치소앞 가게에 가서 두부를 사왔습니다.
그 두부를 먹어본 경험이 있는 아이들과
두부가 맛이 있네, 없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호송차가 도착했습니다.













같이 간 아이들이 뭐라도 해야는건 아닌가 고민하는 사이
영치품과 영치금을 정리한 만호가 걸어나왔습니다.
몇되지 않는 아이들이지만 아이들이 '동지가'를 불러줬습니다.









어머님이 소금을 뿌리시고, 학과후배 수경이가 두부를.(^^ ):

만호야! 고생했다!









그러나 사실 제가 누구보다 미안한 사람은 만호가 아니라 만호어머님이었습니다.
만호는 그래도 이러한 결과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고
한총련 대의원이라는 사회대 학생회장을 '선택'을 했지만,
어머님께는 이러한 결과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도 드리지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오늘 만호의 얼굴보다 어머님의 상기된 얼굴이 더 오래 남나 봅니다.


여기서 '20005의 출소'는 끝입니다.


Posted by 토닥s
TAG 2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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